고용·인사상 불이익 우려
직장내 성폭력 신고 꺼려

피해 사실 털어놓으면
왕따되거나 꽃뱀 오명

신고 간편화·피해자 보호
제도 시급히 마련하고
성폭력 예방 교육 강화를

‘김지영씨는 얼굴형도 예쁘고 콧날도 날렵하니까 쌍꺼풀 수술만 하면 되겠다며 외모에 대한 칭찬인지 충고인지도 계속 늘어놓았다. 남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더니 원래 골키퍼가 있어야 골 넣을 맛이 난다는 둥 한번도 안 해 본 여자는 있어도 한번만 해 본 여자는 없다는 둥 웃기지도 않는 19금 유머까지 남발했다.’(책 ‘82년생 김지영’ 중)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가 8년 전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한국판 ‘미투(Me, too)’ 운동이 번질 조짐도 보인다. 국민적 공분이 이는 데는 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일상이 농담과 격려, 친밀감의 표현으로 포장된 현실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31일 인터뷰에 응한 A(31·여)씨는 3년 전 울산의 한 중소기업에 다닐 때 직장 상사가 한 질문을 잊지 못한다. “남자친구 있나?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입사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40대 중년의 그는 “요즘 애들은 다들 빠르니까…”라며 낄낄거리고 웃었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A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고 했다. A씨는 “참다 못해서 상당히 불쾌하고 엄연히 성희롱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경찰에 신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A씨가 남긴 말은 씁쓸했다. “어쨌든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하니까….”

울산의 조선업체에 다니는 B(31·여)씨도 부서 회식마다 신경이 곤두선다고 했다. “몇년 전 회식 자리에서 부장이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맛있지’라면서 술을 따르라고 강요했다. 다행히 옆에 있는 과장이 웃으면서 상황을 넘겨줬지만 회식 때마다 최대한 부장과 멀리 앉거나 다른 테이블을 찾게 됐다.” 

울산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 566명 중 10명이 ‘피고용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고용한 업주, 사장 등에게 성희롱·성추행·성폭행을 당한 경우다.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피해자가 신고를 꺼린다는 점에서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해자가 고용주가 아닌 직장 내 상사인 경우도 이 통계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직장 내 성폭력’은 오랫동안 지적돼 온 문제다. 검찰, 경찰, 지자체 등 공직뿐만 아니라 대기업부터 청소용역업체까지 어느 조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남성 중심의 조직일수록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조직의 규모가 작을수록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창구도 없다. 공직이나 대기업의 경우 ‘감사’ 부서가 성폭력 실태 조사나 피해 접수를 하도록 정하고 있다. 

형식적인 창구조차도 중소기업이나 영세한 직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조 내부에 여성위원회가 조직돼 있는 경우도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상당수 피해 여성들은 가해자와 그를 옹호하는 직장 전체 분위에 맞서 ‘홀로’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심지어 울산의 경우 성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여성 긴급전화 1366은 위탁업체의 내부 갈등으로 잠정 폐쇄된 상태다.

매년 1회 이상 실시하도록 법으로 정한 ‘성희롱 예방교육’도 실효성은 떨어진다. 교육만으로 직장 내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한계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도 하고, 형식상 참가 확인 서명만 받는 회사도 적지 않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이들은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B씨는 “그동안 이같은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한다”며 “피해자가 부끄러운 세상이 아니라 가해자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공무원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면 직장 내 왕따가 되거나 꽃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는 현실”이라며 “좀더 자유롭게 신고하고, 피해자를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조이영자 여성사업담당자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는 가해자가 고용이나 승진 등 인사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성폭력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피해자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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