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극배우 수는 160여 명. 이들은 9개의 정극단과 1개의 준극단에서 힘든 배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울산연극제를 위해 마지막 연습에 열중하는 연극인들. 이수화기자
현재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극배우 수는 160여 명. 이들은 9개의 정극단과 1개의 준극단에서 힘든 배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울산연극제를 위해 마지막 연습에 열중하는 연극인들. 이수화기자

"버텨, 버티면 살아남아"

나이, 경력, 직업 등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매일 밤 같은 꿈을 그리며 무대 위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 바로 연극배우들이다.

현재 울산 연극배우 수는 160여 명(울산연극협회 기준). 9개의 정극단과 1개의 준극단이 활동 중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돈벌이가 되는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꿋꿋하게 무대를 지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연극 여건이 어려운 지방이지만 이곳의 향수가 좋아 울산 무대에 오른다는 사람들. 그들의 '무편집' 인생 속으로 들어가 봤다.

다큐 '울산1.5일' 일곱 번째 이야기는 울산 연극배우다.

울산연극제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울산 중구 극단 푸른가시 연습실. 이수화기자
울산연극제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울산 중구 극단 푸른가시 연습실. 이수화기자

# "관객들은 기다려주지 않아"

"다음 대사를 빨리 쳐. 관객들은 기다려주지 않아"

성남동의 한 소극장. 약속하지 않아도 오후 7시가 되면 치열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20대부터 70대까지, 경력 2개월 차 신입과 40년 이상의 대선배까지 누구 할 것 없이 의기투합해 연습에 매진한다. 이들은 당장 내일로 다가온 제26회 울산연극제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연습 무대지만 의상까지 갖춰 입고 이미 배역에 푹 빠져있는 듯한 모습.

40년 차 연극배우 전민수(68) 씨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서로 공감하는 게 매력적"이라며 끊임없이 상대 배우와 자세, 표정, 대사를 맞춰본다.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 손가락 까딱하는 손짓까지도 대충 하는 법이 없다.

대선배의 연기를 지켜보며 공부 중인 2개월 차 이반디(49) 씨. "맡은 파트가 나오지 않아 연습하러 와서 입도 못 떼고 간 적도 많지만 전부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극단 푸른가시 연극 배우들이 늦은 밤까지 연습중이다. 이수화기자
극단 푸른가시 연극 배우들이 늦은 밤까지 연습중이다. 이수화기자

# "좋으니까 이 나이까지 하는거야"

"완벽하게", "조금도 삐뚤어지면 안 돼"

제26회 울산 연극제 무대 당일 아침. 리허설이 한창인 배우들에게는 말을 걸기도 어려울 만큼 날카로운 분위기다. 개인이 아니라 단체가 합을 맞춰야 하는 무대기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 예민하다.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갖춰 입으니 소극장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말투나 행동도 그에 맞게 변한다.

무대 분장 25년 차 이현영 씨는 "하나의 캐릭터를 대본에 맞게끔 만들어내야 해서 늘 새롭고 긴장된다"며 무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날 때까지 배우들 곁을 지킨다고 했다.

울산연극제 무대가 펼쳐지는 날 아침, 단원들이 분장에 열중이다. 이수화기자
울산연극제 무대가 펼쳐지는 날 아침, 단원들이 분장에 열중이다. 이수화기자

연극 무대는 소품 준비부터 위치 배열까지 배우들의 손을 거친다. 무대가 이들에게 애틋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무대 최고령 배우인 노영하(75) 씨는 목을 아껴야 해서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무대가 좋아. 그게 이 나이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라며 무대 뒤에서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연습 시간. 뜨거운 조명 아래 서있는 배우들은 한 대사를 할 때마다 모든 소리와 행동을 최상으로 끌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 관객석에 앉아있으면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하나, 표정 변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울산연극제 공연 당일 극단 푸른가시 전우수 대표가 단원들의 피날레 동선을 짜고 있다. 이수화기자
울산연극제 공연 당일 극단 푸른가시 전우수 대표가 단원들의 피날레 동선을 짜고 있다. 이수화기자

# 최종 목표 직업란에 배우로 적기

한 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지자체의 지원 사업에 선정된 단체는 적게는 400만원~2,000만원 정도를 지원받는데 무대 연출비, 대관료, 소품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인건비는 사실상 거의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원받기 어려운 연극인들이 많다.

연극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꿈같은 상황. 대부분의 연극인은 '밥벌이'를 위해 낮에는 또 다른 직업을 지키며 살고 있다. 30년 이상을 연극계에 몸담아온 이현철(54) 씨도 그렇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대학 강의를 나가고 아동·인형극 관련 사회적 기업도 만들었다. 촬영을 하는 이날도 어린이집에 방문해 연극 홍보에 열심이다.

울산대학교에서 무대 기술및 공연장 안전 관리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30년차 연극배우 이현철씨.
울산대학교에서 무대 기술및 공연장 안전 관리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30년차 연극배우 이현철씨.

영어 강사와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40대 김경은 씨도 마찬가지. 적지 않은 나이지만 울산 연극계에서는 4년 차 새내기다. 대학시절 활동했던 연극동아리에 미련이 남아 뒤늦게 연극 세계로 뛰어들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싶은 욕심에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다는 김 씨. 그녀의 최종 목표는 직업란에 배우라고 적는 것이다.

연극 배우로 활동하며 어린이집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경은씨. 그녀의 목표는 직업란에 연극배우라고 쓰는 것이다. 이수화기자
연극 배우로 활동하며 어린이집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경은씨. 그녀의 목표는 직업란에 연극배우라고 쓰는 것이다. 이수화기자

한 연기학원을 운영 중인 하다효지(52) 씨는 후배들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 중이다. 긴 시간 무대를 섰지만 직업이 배우라고 말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는 "지방에서도 연극인들이 설자리가 많아지고 울산에 머무르는 배우들이 많아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밥벌이'를 위해 운영 중인 울산 중구의 한 연기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하다효지씨. 그는 울산에 머무는 연극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수화기자
'밥벌이'를 위해 운영 중인 울산 중구의 한 연기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하다효지씨. 그는 울산에 머무는 연극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수화기자

# "라이브가 매력인 연극에 푹 빠져"

대학 강의를 마친 이현철 씨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1978년 창단한 울산대학교 극예술연구회 '드라마' 동아리방이다. 모처럼 연극 후배들을 만나게 된 그의 표정엔 설렘이 가득하다. 동아리방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 44명의 단원들로 구성돼 있는 '드라마'는 매년 3월·9월 년 2회 정기공연을 펼친다. 올해 들어온 신입 단원들은 4: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 손현준(20) 씨는 "연극은 직접 라이브로 하는 게 매력적이다"라며 '무편집'에 푹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1978년 창단한 울산대학교 극예술연구회 '드라마' 동아리방에 방문해 이야기 중인 이현철씨와 동아리원들. 이수화 기자
1978년 창단한 울산대학교 극예술연구회 '드라마' 동아리방에 방문해 이야기 중인 이현철씨와 동아리원들. 이수화 기자

생각보다도 많은 인원이 열정을 뿜어내며 연습하는 모습에 이현철 씨는 "코칭을 해주려고 했는데 기대 이상의 실력이네요"라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이내 복잡한 심정도 함께 내비친다.

"연극계에서 울산은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에요. 시립극단도, 대학에 관련 학과도 없는 울산에서 젊은 후배들이 얼마나 버텨줄지 걱정입니다"

# 지역 소재 이야기 다양한 작품 탄생

1988년부터 36년간 극단 '푸른가시'를 끌어운 전우수(61) 극단 푸른가시 대표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수화기자
1988년부터 36년간 극단 '푸른가시'를 끌어운 전우수(61) 극단 푸른가시 대표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수화기자

대본부터 감독까지 도맡아 하는 그가 주로 선보이는 것은 지역을 소재로 한 이야기. 울산이 타지 사람이 많이 모인 만큼 애향 의식이 결여된 동네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 결과 '간절곶(아린기억)', '은미' 등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오후 11시. 밤늦은 시간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는 전 대표의 눈빛이 날카롭다. 연극 무대를 앞두고 있는 만큼 한층 더 냉정하게 배우들을 지적한다. 몇 번을 반복해도 고쳐지지 않는 연기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소품 위치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는 "연극 장르는 개인 예술이 아니라 단체 예술이기에 한 사람이 빠지면 전체에 피해를 주는 것"이라며 "바깥 유혹을 끊어낼 줄 알아야한다"고 말했다.

# "무대 위 내려오는 먼지 반짝이는 별"

"1순위가 항상 이걸로 변경되면 그게 '전부'래요" 본인에게는 연극이 그런 존재라고 말한 하다효지(52) 씨.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먼지가 흡사 '반짝이는 별' 같다며 그마저도 너무 좋다는 조이안(53) 씨. 이들은 수많은 무대에 서봤지만 매 무대마다 설렌다.
 

"찾아와주는 관객이 있기에 연극배우가 있는 것"이라는 울산 배우들. 사진은 극단 푸른가시의 출품작 '간절곶' 주인공을 맡은  이현철씨. 이수화기자
"찾아와주는 관객이 있기에 연극배우가 있는 것"이라는 울산 배우들. 사진은 극단 푸른가시의 출품작 '간절곶' 주인공을 맡은 이현철씨. 이수화기자

이들은  "찾아와주는 관객이 있기에 연극배우가 있는 것"이라며 무대를 보고 따끔한 일침과 칭찬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무대를 품고 살아가는 울산 연극배우들. 그들은 오늘도 내 삶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며 수많은 희로애락을 느낀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서 더욱 빛난다.

이번 영상은 울산매일 UTV 채널(youtube.com/iusm009)과 홈페이지(www.iusm.co.kr), 인스타그램(@ulsan_maeil)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최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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