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1905년, 한·일 간에 ‘을사조약(乙巳條約·1905년)’이 체결되자 당시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분노의 논설을 썼다. 

 「아! 4,000여년간 수호된 강토! 500여년의 사직을 일본에 들어 바치고, 2,000만 生靈(백성)들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은 명색이 참정대신이고 조정의 수석임에도 단지 「否(부)」자로서 책임을 면하려하고, 이름거리나 장만하려고 하고…」

 1910년 8월 22일! 서울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종황제, 중추원 의장 등 전 각료들의 최종 어전회의가 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그동안의 한·일교섭 내용을 대강 간추려 설명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병합은 불가피하다고 통보한다. 대신들은 모두 지당하다고 응답했다. 이윽고 순종 황제가 입을 열었다. 

 "諸臣(제신)들이 可(가)하다면 朕(짐)도 이의가 없다. 日·韓一家(일·한일가)됨은 동양평화를 위한 일이다…" 아! 이것이 한·일간 을사조약통과에 임해 조선 어전회의가 취한 모습이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Korea)에 대해 「베스트팔렌(Westfalen) 원칙」에 준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국가로 정식으로 승인했고, 열강들은 조선과 맺었던 여러 조약에서 조선의 주권을 ‘대한(大韓·Korea)’으로 승계하는 것으로 했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도 부르고 있었는데, 이런 국가를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내다니! 아! 을사보호조약을 탄생시킨 이 어처구니 없는 어전회의대신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갈 무렵 미국의 S·루즈벨트 대통령(1858~1919)은 국무장관에게 이렇게 말한다. "Korean은 적(敵)에게 분노의 주먹 한대도 날리지 못하는 민족이다…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국민들의 나라를 돕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S·루즈벨트 대통령이 틀린말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는 최강의 양대해양강국 영국은 동북아, 미국은 태평양으로 세(勢)를 넓혀가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과 아편전쟁으로,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은 일본개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영·미 두 해양강국의 목표는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는 것이었다. 조선은 영·미 편에서 시간을 벌면서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것이 순리였다.  

 이 무렵 방한한 영국기자 멕켄지와 조선 조정의 실력자인 탁지부대신 이용익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조선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국방개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 유럽 등과 조약을 맺고 있고 그들이 독립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아니 모르시오?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조약은 아무 소용없다는 걸! 그 조약이 지켜지려면 당신들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요" "우리는 중립(中立)이라는 걸 천명했소…." 멕켄지 기자의 의견에 조선 조정 탁지부대신의 이 기개 없는 응수! 참으로 분노스럽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왜 그런 길을 선택했을까? 일본처럼 개혁하기도 싫었고 목숨 걸고 싸우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氣」로 4,000여년간 민족사를 지키고 살아왔는데, 그들(이용익등의 대신들)에게 기(氣)는 손톱만큼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위정척사파, 개화자강파, 동학사상파 등은 나름대로 구국운동이었으나 그들은 자기와 방법이 다르면 상대를 처음부터 원수로 여기는 끼리끼리 이데올로기만 발동했다. 만약 당시 지도층들이 정치적 이념을 상대의 강점에서 찾아 구국일심(救國一心)에 귀일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분노(憤怒)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이지만 분노철학이 있다. 플라톤(BC427-347)은 분노의 긍정적 측면을 탐색했다. 그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거룩한 분노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튀모스’라는 덕목을 분노와 연결시켰다. 그것은 기(氣) 곧 불의(不義)에 대한 공분(公憤)을 의미한다. 한국을 강제합병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에 대한 안중근의 저격은 플라톤의 거룩한 분노였다.

 당시 친일(파) 발생은 세도가문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신들 가족의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18세의 철종→12세의 아동수준의 고종을 연이어 즉위시킨것은 참으로 분노스러운 일이었다. 안동김씨→풍양조씨→다시 안동김씨로 이어진 조정의 가족적인 끼리끼리 권력은 정치문란을 만들어 냈다. 벼슬자리를 놓고 벌린 매관매직은 지방의 수령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호가됐고 그것은 일본 침략자들에게 좋은먹이가 됐다. 이런 부정부패로 국가 골격인 삼정(三政)이 문란해졌고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란 일본 먹이가 요리된 것이다. 마침내 민란(民亂)이 유발됐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었다.

 이 당시 캐나다의 선교사로 한국에 온 스코필드(1889~1970) 박사는 "한국의 3·1운동은 정의로움과 공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다"라고 하며 한국인을 격려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시위때 그는 일본군이 시위자에 대해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장면을 용감하게 사진에 담아 분노의 글을 첨부해 전 세계에 고발했다.

그 해 4월, 일본군이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제암리 학살사건)할 때는 현장을 촬영하고 일본군의 잔학무도한 만행에 대한 분노의 보고서를 작성해 온 세계에 고발했다. 반세기전 스코필드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서 "공의롭고 정의로워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부패를 증오하고 악(惡)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선(善)한 용기를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실제로 내보인 그에게 우리 국민은 3·1운동의 제34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정치판에 이런저런 분노스러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스코필드같은 거룩한 공분(公憤)의 사람들이 많이 활동했으면 싶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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