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의 토요일 오후, 책방에서는 신간 ‘쓰는 만큼_내가 된다’를 쓴 팔로워 13만 기록 인플루언서, 리니 작가의 북토크가 있었다. 정원 20명을 훌쩍 넘긴 인원이 책방 안을 가득 채웠다. AI의 변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가운데 아날로그 기록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있는 작가와, 기록을 사랑하는 울산 그리고 울산 근교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리니 작가가 기록을 처음 접하게 된 때의 이야기부터 삶의 전환점이 돼준 이야기, 그리고 바로 해볼 수 있는 아날로그 기록 팁이 이어졌다. 몇몇은 다이어리를 무릎 위에 놓고 펜을 꺼냈고, 몇몇은 휴대폰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책방 안은 고요한 열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북토크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난 뒤에도 머릿 속은 기록에 대한 생각과 질문으로 채워졌다. 언제 처음 기록을 시작했는지, 기록이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 기록이라 칭할 수 있는 기억은 초등학생 때부터 쓴 일기에서 시작된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지 않아도 부모님은 매일 일기를 썼는지 확인하셨고, 6학년이 될 때까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매일 일기를 썼다. 뭘 써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거나, 일기에 지칠 땐 간간히 시를 썼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싸이월드에서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이르기까지 올렸던 게시글은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어져 온 일기의 역사일 것이다.
작년 연말부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보이려 하지 않는 글은 잠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다. 일과를 쭈욱 나열하기도 하거나, 기뻤던 순간을 다시 쓰면서 조용히 자축하는 밤이 있다.
또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화와 슬픔이 찾아올 땐 휘갈기고 찍어 누르며 토로하는 밤도 있다. 스쳐 지나가는 영감과 느낌은 노트와 휴대폰 기록장에 메모하고,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도 빈 노트를 꺼내든다. 기록은 그렇게 나를 이루고, 또 나를 떠나게 한다. 문득 펼쳐든 노트에서 과거의 내가 보낸 위로와 응원을 받기도 하고 아등바등하던 시간을 읽으며 지금은 그때보다 원하는 것에 더욱 가까이 왔구나, 새삼 느낀다. 어쩌면 기록은 지난날의 기록 앞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 세 존재가 하나로 머무는 시간이 아닐까.
디지털 메모도 좋지만 아날로그 메모의 매력은 더욱 강렬하다. 지금 있는 장소의 분위기를 느끼며 종이를 쓸어넘기고, 펜을 쥐고 사각이며 쓰는 행위. 우리는 직접 씀으로써 오감을 활용한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에서도 창조성을 깨우는 중요한 도구로 제시하는 것이 ‘모닝페이지’이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일정 기간 동안 그대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책에서는 썼던 기록을 돌아보면서, 또는 쓰는 동안 막혀있던 창조성을 되찾은 창작가들의 경험을 함께 소개한다. 작년에 출간된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에서도 손으로 쓰는 글의 힘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아날로그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실로 큰 것을 알 수 있다. 리니 작가의 ‘쓰는 만큼_내가 된다’에서는 다양한 아날로그 기록법과 그에 걸맞는 노트와 필기구를 소개한다. 서점에 가서 관심 가는 책의 도서명을 써보면서 본인의 요즘 관심사를 파악하거나, 매일 오후 3시 무얼 하고 있는지 쓰는 기록 방법도 있다. 그저 흘려보낸 시간 속에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고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듯 아날로그 기록의 장점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빨라지는 속도만큼 바빠지는 삶. 나를 돌아보기도 벅찬 시간, 언제 기록을 하나 싶지만 휴대폰 앨범 속에 담긴 사진들과 종종 올리는 인스타그램 스토리, 다이어리에 쓰는 기록들. 주변을 둘러보면 각자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걸 어떻게 풀어가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기록’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 나와는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럿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모두 기록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문득 글을 쓰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책방 손님들만 보아도 요즘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쓰는 것도, 나를 찾아가는 것도 사실 오늘 쓴 작은 기록에서 출발한다. 늘 똑같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싶다면, 인상 깊은 책을 읽고 불현듯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오늘 당장 노트와 펜을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김수빈 작가·책방 그럼에도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