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 운동 영향 여인들 기가 쎄
방어진 등대 소풍가면 멋쟁이 대접
고등학교때 사라호 태풍 끔찍
태화강둑 무너져 성남동 물바다
옛 태화교 건너 강남·강북 통학
태화교 일대·강변 포플러 많아

 

◆“병영에서 태어나 귀여움 받으며 자랐죠”
울산군 하상면 남외리 489-3번지에서 태어났어요. 지금 없어졌어요. 병영 네거리 8차선 안에 다 들어가 없어졌어요. 내가 둘째 딸인데, 42년생이고, 언니는 40년생이고, 언니는 반구동 677번지에서 나서 그쪽으로 왔대요. 언니는 태어나서 한 살 때 정미소 집으로 왔고, 나는 정미소 집에서 태어났고. 상당히 큰 집이었어요. 방이 6개, 끝에도 하나 있고 7개, 대청이 3개. 기와집이 있고, 안 사랑도 있고. 

김홍명 구술자가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병영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정미소를 연 게 스물세 살이었대요. 6·25 때는 공장들이 다 없어졌으니까. 낙동강 이남만 정미소가 남았지. 전쟁 기간 동안에 곡식을 계속 찧었지요. 우리 집 일꾼이 한 40~50명 됐으니까. 계속 찧었어요. 그리고 일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리고 트럭 두 대가 정미소 안에 들어올 정도로 정미소 규모가 컸어요. 우리 집에 트럭이 두 대나 있고, 아버지 차도 있고. 

◆“유치원 다닐 때 우리 동네 다 기억나지. 병영이 아름다웠어요”
병영이 좀 기가 쎄요. 여기 여인들이 그랬어요. 병영 여인들이 방어진 등대에 소풍을 갔잖아요. 촌스러운 게 하나도 없어요. 요새 부인들보다 멋쟁이에요. 다 한복을 입었어요. 아버지가 다 트럭에 태워서 갔겠지. 아버지가 초대했겠지. 병영에 우리 친구들이 다 기가 있었어요. 병영에 3·1만세 부르고. 제 생각에 병영이 좀 다른 거 같았어요. 

1944년 병영정미소 종업원들과 함께.
1952년 봄 병영부인들의 방어진 야유회.
추석날 병영역 철길에서 사촌들과 함께.

◆“전쟁 때 칠판 메고 산에 가서 공부했죠”
6·25 때는 우리가 까만 사람, 하얀 사람, 별사람을 다 구경하잖아요. 부산에 내려가지고 이쪽으로 해서 경주로 가는, 국도가 그거뿐이니까. 우리는 병영에서 과자 달라 하면 야단맞으니까, 저 학성공원 근처에 가서 과자 달라고 손 내밀면, 미군 병사들이 두 손가락을 펴요. 빅토리지. 우리는 이게 빅토리인지 모르고 두 개 말고 다섯 개 달라고. 까만 사람 하얀 사람 아주 각양각색의 군인들이 올라갔어요. 6·25에 대해 심각한 건 모르고. 학교가 없어졌으니까 산에서 공부했어요. 북부순환도로 그쪽 뒤에 산이 있잖아. 그러면 요만한 칠판 하나 메고 가서, 비 오면 참 좋지요. 학교 안 가도 되니까. 하하하. 구굿셈 외우고, 그냥 교과서를 달달 외웠지 뭐. 

◆산전샘·산전미나리·병영유기 
병영 일대에 밭이 많았죠. 계비고개 그게 다 밭이고. 병영역에서 교회 까지만 집이지, 그다음에는 다 들밭이지. 그다음에 산전샘 가는 길에 집이 있고. 산전샘 그 물이 너무너무 좋아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아요. 산전 미나리. 물이 맑으니까 미나리꽝도 많고, 그다음에 평산에 그 미나리꽝이 많았어요. 물이 좋았어요. 거기 냉거랑. 동천에는 미나리꽝 그런 게 없어. 둑이 두 개 있고, 그게 가면 조개섬에 조개 잡으러 가잖아. 병영학교 북동 그쪽에는 이렇게 손재주 있는 사람이 많았어요. 법주 아줌마가 있는데, 우리 스웨터 같은 거 다 만들고, 스웨터 맡아가지고 만들어 주고, 그다음에 유기 집이, 병영유기 유명했어요.

◆“아버지 선거 운동하는데 제법 따라 다니고 했어”
아버지가 도의원, 초대 도의원이었어. 한 52년 될 거예요. 그때 아버지는 삼십 얼마 됐어요. 아버지 1917년생이에요. 19년인지, 17년인지 몰라. 아버지 선거 때 문둥이 마을에 갔거든요. 몰래 따라갔지. 스리쿼터 뒤에 숨어 있어가. 병영에서 바로 발견이 되면 우리 끌어내려. 다 따라 내려가지고 안 데리고 가요. 그러나 딱 숨어 있다가 병영을 출발해서 가면 데리고 가요. 

◆“고등학교는 서울로 갔어. 대학은 이화여대 미대로 갔지”
고등학교는 서울로 갔어. 이화여자고등학교를 갔어요. 대학은 이화여대 미대로 갔지. 회화학과 1등으로 들어갔어요. 회화학과 1등인데 30명이었어. 반은 동양화, 반은 서양화인데, 서양화가 좋아서 서양화를 간 게 아니라 거기가 세니까 갔지. 그 당시에는 홍대는 2차고, 여학생은 이화대학, 화가가 되려고 간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가 있으니까 간 거고, 아버지는 예술을 사랑하는 예쁜 딸로 길러가지고 판·검사한테 시집보내려고 했겠지. 60년에 입학해서 65년에 졸업을 했어요.

◆“울산농고에 딱 1년 있었죠”
울산농고에 딱 1년 있고, 다음에 여중·고에 갔어요. 65년에 울산에 와서 66년에 울산여고 갔어요. 여선생이 귀한 시절을 보냈어요. 전문대학 하고, 대학 하고. 한 10년은 저뿐이 없었고, 그리고 그때는 울산여고에 가서도 가사 선생님 빼고는 여선생이 없었습니다. 

◆“울산여고로 가서는 6년을 있었어요” 
울산여고 있을 때 피스코(Peace Corps)라고 평화봉사단이 왔어. 로즈마리 앨버트라는 선생님이 울산여고에 왔어요. 울산여고에 왔을 때, 지금 울산여고 자리에서 보면 주변이 다 보였어. 공업탑 하나만 있고 다 벌판이었어요. 집 없었어요. 논은 있었어요. 옥동이 다 논이었어요. 옥동길 그게 다 논이에요. 포도밭은 종하체육관 쪽이 포도밭이에요. 그거 다 포도밭이에요. 그리고 다 보리밭이지.

◆“울산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다”
울산여고에서 73년에 여기 울산전문대학으로 옮겼지. 봄에 이화여자 대학교 대학원을 갔어요. 회화를 안 하고, 서양화를 안 하고, 여기가 공업전문대학이니까 디자인을 해야 되니까, 회화하고 가장 가까운 분야를 해야 되는데, 백태호 선생님이라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이 거기 이화대학 선생님이야. 76년에 졸업하면서 여기에 전임이 됐지요. 그전에는 시간강사지요. 
◆“병영 동천에 물이 많았지” 
요새는 물도 없고 한데, 나 어릴 때는 물이 맑았어요. 우리는 동천에서 수영하고 그랬어, 철교가 있었어. 한 번은 가물어가지고 되게 가물어가지고 그 모래 도랑을, 동천강을 팠어요. 파니까 물이 있더라고. 깊이 팠어요. 모래를 많이 팠는데 거기에 미끄럼하고 있었어. 

◆“사라호 태풍 때 태화강 둑이 터져서 성남동 일대가 물바다가 됐어”
사라호는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그래 있었어요. 성남동에 제가 유미 빌딩 거기 원룸이 있었어요. 자고 아침에 학교 가려고 아침 먹으러 가니까 동네 주변이 물에 다 빠져있더라고. 성남시장이. 태풍 불면 거기는 일대가 다 물에 빠졌어요. 지금 시티빌딩, 울산에 빌딩이 그거밖에 없었어요. 최초의 빌딩. 거기에 지금, 옛날 유미사진관이었어요. 지금 중구에 주차장 짓고 있죠. 옛날 상업은행 네거리. 그 위쪽으로 조금만 가면 세 번째 집인가? 그런데 그거 빌딩뿐이 없었어요. 

◆나뭇가지가 영락같이 날리던 태화강가 
나중에 제2태화교가 생긴 거지. 제1태화교는 울산교. 지금 울산교는 옛날 태화다리, 그게 울산교고, 지금 차 못 가는 그거지. 그때 그거뿐이 없었어요. 제가 울산 왔을 때. 거기에 아침에 농고 학생하고 농고 선생은 저리로 가는 거야. 그걸 건너서 강남 쪽으로 가는 거고, 그쪽에 사는 애들은 울산여고 울산여중 이렇게 오고. 하교하는 길에 만나지는 거지. 
태화다리 그 일대는 포플러, 저쪽 강변으로 포플러가 많았어요. 봄에 조그만 잎이 나서 얼마나 이쁜데. 그게 영락같이 생각했어요.

◆“내가 좋아했던 곳은 학성공원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벚꽃이 피고, 우리 소풍 가고. 학성공원이지. 그 옆을 지나가 학교를 가요, 학교가 학성동에 있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곳은 병영에는 면사무소, 하상면사무소 소나무가 이뻤고. 약사동에 거기에 제당이 있었어요. 울산이 개발되면서 없어졌어요. 장생포에 가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데 유공의 어떤 사람이 사진을 찍었어. 그 사진 찍은 사람이 사진을 전달한다고 그러더라고. 그랬더니 유공에 다니는 친구가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 그 사람 안 좋은 사람이라고. 하하하. 그래서 안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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