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이 주관하는 '경주처용무 포럼'이 을 주제로 지난 17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신라처용무보존회 제공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이 주관하는 '경주처용무 포럼'이 <경주, 처용무의 역사성>을 주제로 지난 17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신라처용무보존회 제공
 

 

"'처용설화'의 발생지는 울산이 아닌 경주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처용무'의 바탕이 된 울산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 '처용설화'의 역사성이 훼손되고 있다. 경주 지역 문화단체가 처용설화의 배경이 된 개운포와 처용암, 망해사 등의 유적이 현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처용무'에 이어 '처용설화'의 공간적 배경마저도 경주로 특정 지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 주관 '경주 처용무 포럼'에서 김성혜 동국대학교 연구교수는 '처용무의 역사 도시 울산인가 경주인가?'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조의 내용을 바탕으로 처용설화의 공간적 배경을 검토한 결과 그 지역은 바로 '경주'로 드러났다"면서 "울산은 처용이 경주로 이주하기 전에 머물렀던 지역으로, '동해용'이 춤춘 가무의 공간적 배경을 지닌 지역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처용무의 역사도시도 경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울산에서 처용무가 울산 지역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행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으로, 처용무 역사를 약 53년으로 볼 수 있고, 경주에서의 처용무 역사는 신라 시대 헌강왕 때 궁성인 월성 남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 부근에 있는 처용의 집에서 처용무가 발생해 전승돼 오다 1963년부터 신라문화제에서 연행한 기록이 남아 있고, 이 전통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했다.

김 연구교수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지역의 향토사학 연구자들이 발끈하고 있다.

양명학 울산대 명예교수는 "처용무는 처용이 그의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발견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 것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헌강왕이 경주 남쪽 울산 개운포에 이르러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춤을 춘 것이 발단"이라며 "처용설화와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통일신라 헌강왕이 행차했다는 한반도 남동쪽은 울산 개운포(오늘날의 황성동 세죽마을)이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어 "처용무의 노래곡조와 춤사위로 보아 느리고 장엄하기 때문에 처용이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나올 때 춘 춤이 아니고, 울산 개운포 지역의 무역 토호로 추정되는 처용의 아버지가 일곱 아들을 불러 헌강왕 앞에서 올린 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개운포, 처용암, 처용리, 임금산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처용 이야기는 설화가 아니라 사화이고, 따라서 처용무의 출산지가 울산이라는 것을 김 교수는 놓친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지역 향토사학 연구자는 "울산은 처용이 경주로 이주하기 전 머물렀던 곳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쉽게 수긍할 수 없다"면서 "과거 경주가 울산보다 중요한 도시였던 만큼 처용무를 가장 오래 전수한 지역임은 틀림없으나 처용설화의 본향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울산이 최근 '처용'과 관련한 문화 콘텐츠를 보존하고, 이를 활용하는 데 소홀하다 보니 '처용설화'의 근거지라는 역사성마저 오도되고, 폄훼되고 있다"면서 "지역사회가 한목소리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지킬 것은 반드시 지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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