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 '임산부 먼저'라고 표시된 자리가 있다. 임산부를 배려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부산을 방문할 때면 한 번씩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그때마다 이 자리를 눈여겨보게 된다.
이름은 '임산부 먼저'인데 정작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임산부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 젊은 여성은 물론이고 건장한 젊은 남성이 앉아 있는 모습도 보면서 그 자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이른 아침에 부산에서 지하철을 이용할 때였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고,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임산부 먼저'라고 표시된 자리도 이미 중년여성이 앉아 있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자 그 여성이 내리고, 또 다른 중년여성이 그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면서 몇 정거장을 이동했다.
환승역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몰려 지하철 안이 순식간에 복잡해진 그때 임산부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여성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니 그녀 앞에 임신한 여성이 서 있었다. 중년여성은 앉아 있던 자리를 임신부에게 선뜻 내어주고 앞으로 비켜섰다. 임신부는 가볍게 목례하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중년여성 역시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길인 듯 보였다. 피곤한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도 앉아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 앞에 임산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침이 참 환해졌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뿐인 짧은 순간의 장면이 하루 종일 마음에 따스함으로 남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때로 이런 작은 행동이다. 우리는 흔히 배려를 거창하게 생각한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큰돈을 기부하거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배려는 아주 작은 누군가를 위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는 것,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는 것,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위해 같이 힘을 보태 주는 것, 그리고 나보다 조금 더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양보하는 것들이다.
지하철의 '임산부 먼저' 좌석도 바로 그런 작은 배려를 위한 사회적 약속일 것이다.
10월 10일은 임산부의 날이다. 모자보건법에 따라 임신과 출산의 중요성을 알리고 임산부를 사회적으로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10월의 풍요와 수확의 의미와 임신 기간인 10개월을 의미해 10월 10일을 임산부의 날로 제정했다고 한다.
임산부의 날에는 임신과 출산을 축하하고, 임산부를 배려하며, 출산과 양육의 어려움을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의 다양한 행사와 캠페인이 열린다. 생명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임산부 배려를 위한 특별한 날을 정해야 하는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임산부 먼저'라는 말은 지하철 좌석 하나를 먼저 사용하라는 가벼운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그 말에는 '당신과 아기를 우리 사회가 함께 배려한다'는 사회적 약속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저출생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출생아 수가 줄고, 어린이집과 학교의 학생 수가 감소하고, 지역의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대학의 수시 1차 모집이 끝났다. 학생을 모집하고 신입생을 맞이하는 대학의 입장에서 해마다 느끼는 현실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는 대학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됐고, 대학마다 학생을 확보하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아이를 낳는 일은 한 가정만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회 전체의 미래와 연결돼 있다.
임신한 여성이 지하철에서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사회,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눈치 보지 않는 사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불편해하기보다 조금 기다려줄 수 있는 사회,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지 않는 사회,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회가 돼야 출산을 둘러싼 부담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임산부의 날, 생명을 품은 사람을 존중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을 배려하며, 다음 세대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사회.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는 저출생의 해답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대학 입시 때마다 학생이 부족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할 설렘과 기대에 부풀 수 있는,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기대한다. 정영혜 울산과학대 식품영약학과 교수·북구어린이·사회복지급식 관리지원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