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프지 말자.
새벽에 잠이 깨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니 방안이 환했다. 무엇 때문인지 둘러보니 창문을 넘어온 달빛이었다. 그런 달빛을 여름 새벽녘에 본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달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창문을 열었다. 반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서서히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오고, 이윽고 새날이 시작될 것이리라.
달을 보다가 문득 까마득히 잊고 지낸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행상(行商)을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된 정읍(井邑)에 살았던 백제의 아낙네. 그녀가 부르다 남긴 정읍사(井邑詞)를 불러본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저자(市場)에 가 계신가요?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무엇이든 다 놓아버리십시오
아아, 내 님 가시는 데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정읍사는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유일한 시가(詩歌)이다. 멀리 행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여인의 한(恨)과 기다림을 노래한 시가이다.
백제시대, 정읍에 사는 한 아낙네가 장사를 하러 떠난 남편이 돌아올 날이 돼도 오지 않자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기다리는 것뿐이다.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밤이 오면 방안에서 기다리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간다. 마당에서 기다리다가, 대문 밖에서 기다리다, 동네 어귀에서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리는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먼 곳을 볼 수 있는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하늘 높이 뜬 달을 보면서 빌고 빈다. 그 간절함이 아낙네의 입에서 나온 애절함이 돼서 노래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빌고 빌어도 기다린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아내는 그래도 날마다, 밤마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면서 기다렸다. 하염없이 기다린 그녀는 결국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그래서 정읍사는 망부석의 한 유형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아낙네가 망부석이 된 바위가 정읍 고부의 두승산 자락에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 고장에 전해져 오는 치술령의 박제상(朴堤上) 부인에서 유래된 망부석의 설화와 연결된다. 치술령의 망부석은 오늘도 동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정읍가는 하늘 높이 뜬 달에게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애달픈 시가 되었다. 이별의 슬픔, 특히 부부간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은 공무도하(空無渡河)가 있다. 공무도하가는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과 이별을 하지만 정읍가는 부부가 서로를 보지 못하고 먼 곳에서 이별을 한다. 보이는 이별과 보이지 않는 이별, 무엇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할까? 나는 이별은 다 가슴이 아프던데.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창문을 닫고는 달빛이 주선한 정읍가의 아낙네와 이별을 한다. 돌아서면서 생각을 한다. 이 가을,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다. 김봉대 울산아동문학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