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관술선생이 대학재학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낸 편지 겉표지. 주소지에 경남 울산 범서라는 지명이 보인다. 사진제공=이관술연구회  
 
   
 
  ▲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 있는 이관술 선생 생가를 외손녀 손옥희 씨가 둘러보고 있다.   
 
   
 
  ▲ 졸업앨범에 실린 이관술 선생 사진. 사진제공=이관술연구회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이관술 선생의 범죄인명부. 사진제공=이관술연구회  
 
   
 
  ▲ 이관술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낸 편지 속 내용. 사진제공=이관술연구회,  
 
   
 
  ▲ 이관술 선생의 딸 이경환 어르신. 5녀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이관술선생의 외손녀 손옥희씨와 외손자 손용석씨. 이관술 선생의 항일활동을 연구한 한국외대 임성욱씨의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연구’논문집을 들고 있다.  
 
   
 
  ▲ 이관술 선생의 막내딸 이경환 어르신. 5녀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울산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인 이관술 선생(1902~1950)을 재조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지역의 향토사학자, 교사, 작가 등이 참여하는 ‘이관술연구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4월 출범을 목표로 준비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은 지난달 울주군 범서에 위치한 이관술 선생의 생가를 답사하고, 울주군에 입암 항일운동마을 복원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관술 선생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린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맞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광복 후 좌익 활동에 몸담은 전력 탓에 아직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본지는 지난 1992년~1993년까지 이관술 선생이 대학시절을 보낸 일본 현지취재 등을 통해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4월 이관술 선생의 막내딸 이경환(85·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씨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아버지의 사형 집행이 잘못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 승소 판결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판결을 통해 국가 권력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 된 지 4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평화시대’를 향한 항해가 시작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이관술 선생 유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이관술 선생의 외손자 손용석씨가 운영하고 있는 경주 양동마을 입구 카페에서 만난 외손녀 손옥희씨(58·경주 안강여고 교사)는 “외할아버지의 항일운동 행적을 재조명하는 활동도 이어지면서 이제 숨을 좀 쉬고 있다”고 말했다.
손 씨는 “손해배상청구소송 승소 후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에로 멸시와 냉대 속에 한평생을 살아야 했던 가족들의 한 맺힌 삶이 작게나마 보상을 받게 됐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손 씨는 현재 이관술 선생 처형의 원인이 되었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주도 혐의’에 대한 재심의를 위해 관련 자료를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수집하고 있다.
이관술 선생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사회주의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가로 항일 투쟁을 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의 간부를 지냈다.
그러다 1946년 7월 6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무기형에도 불구하고 정치범 1,800명과 함께 대전 동구 산내면 낭월동 골령골에서 총살을 당했다.
유족들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란 1946년 5월15일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내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 선생은 같은 울산 출신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고문을 받게 된다.
이 사건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권위주의 국가가 조작사건을 이용해 국가가 원하는 방향 즉 공산당을 몰아내고 우익이 집권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상을 통제하고 체제유지와 정권연장에 이용한 전형적인 사례’라는 연구 결과(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법률가들·창비’·한국외대 임성욱씨 논문‘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연구’)를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같은 연구결과에 힘을 얻어 이 사건을 재심의 해달라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관술 선생은 슬하에 5녀를 뒀다. 5녀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막내딸 이경환씨는 최근까지 양동마을에서 지내다 치매증상을 보여 현재 인근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요양병원에서 만난 이 씨는 온전한 정신으로 기자를 맞았다. 이 씨는 아버지, 이관술 선생에 대한 기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 고생을 다 말로 할 수 있나?”는 말만 반복했다.
딸 손옥희씨에 따르면, 이 씨가 부친인 이관술 선생을 처음 본 것은 7살 때였다고 한다. 이 씨가 기억한 이관술 선생은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이 씨는 어릴 적 김치감(삭힌 감)을 몰래 훔쳐 먹다 감췄는데 이관술 선생이 이를 알고 작은집으로 며칠 동안 쫓아냈다고 한다.
손 씨는 “가정을 놓으시고 항일운동만 한 가장 아래 어머니 뿐 아니라 이모들, 외할머니 모두 숨도 못 쉬고 뿔뿔이 흩어져 일찍 연락이 끊겼다”며 “가족들은 문민정부 시대부터 숨을 조금씩 쉬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후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조금 더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손 씨의 남동생인 손용석씨(49)는 “어머니께서는 빨갱이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평생 숨도 못 쉬고 사셨다”며 ”친일파 후손들은 호위호식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기도 못 펴는 이런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할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지난 1992년 유족들은 이관술 선생의 생가가 있는 선바위주유소 안쪽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 비문은 당시 본지 장성운 편집국장이 썼다. 하지만 지역의 보수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유족들은 비석을 뽑아내고 생가 앞 밭 한가운데 깊이 묻었다.
땅 속에 묻힌 기념비가 다시 세상으로 나와 세워질 수 있을까. 유족들은 이념 갈등이 사리질 ‘한반도 평화시대’의 도래를 가만히 지켜보겠다고 했다. 고은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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