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논설실장
김진영 논설실장

 조선조 때 경상과 전라 충청의 삼남은 곡창이었다. 전라의 세곡선은 서해의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 무시로 한강 마포나루에 묵었고 경상의 세곡선은 부산포로 집결해 물금나루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한양을 향했다. 곡창의 곳곳마다 세곡의 창고가 들어서는 건 당연한 일,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야강을 따라 부채살로 갈라진 곡창의 곡물은 서창과 남창이라는 웅장한 창고를 남겼고 그 흔적이 지명으로 변해 지금도 양산의 서창과 울주의 남창이 과거의 영화를 이름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 울주 남창은 서창과 달리 곡물에 해산물과 옹기까지 더해 세곡선의 물량이 양과 질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 웅장한 역사가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현장이 됐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민초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거점으로 제몫을 톡톡히 했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봄기운에 떠밀려 달려간 곳이 바로 남창이다. 

 남창은 지금 동남권 변방에서 수도권과 2시간 대로 맞닿은 엄청난 역사가 진행중이다. 그 뿌리는 바로 일제강점기에 깔린 철도다. 울주 온양읍 남창리에 있는 오래된 남창역은 지난 1935년에 들어섰다. 왜가 동해의 등짝을 철도로 연결해 산업물동량을 극대화하고 대동아전쟁의 군수물자 공급을 원활히 하겠다는 목적으로 대역사를 벌인 철도다. 지금은 동해선 전철의 완공으로 용도폐기된 간이역사는 지난 2004년 9월 4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철망에 둘러싸인채 보존되고 있다. 간이역의 구조는 목조 건물로 후면부 지붕 한쪽에 2개의 박공지붕을 중첩시켜 산 모양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상징물로 갈색 지붕이 올린 모습이 일제강점기 간이역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역사 인근에 창고와 관리동이 빽빽하게 들어서 수탈의 현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최근에는 이 역이 남울주의 거점 역으로 남창의 새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역이 됐다. 불과 얼마전 광역철도 개통 이후 남창역에 무궁화호가 정차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진뒤 주민들은 선로 점거 등을 예고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300년 역사의 장터와 외고산 옹기, 곡창과 온천의 풍부한 인프라를 가진 땅에 열차를 패싱한다는 결정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코레일은 잘못을 인정하고 남창역에 모든 열차를 멈추게 했다. 지금도 서울과 연결되는 새로운 고속철도 KTX 이음 정차역 문제로 시끌하지만 어떤식으로든 열차의 운행은 남창을 지나치지 못하는 역사를 가졌다. 

 남창에 왜 기차가 서야 하는지는 과거를 살피면 잘 안다. 남창의 지정학적 위치는 절묘하다. 바로 위가 한반도에서 처음 햇살이 머리를 내미는 땅 간절곶이고 바로 옆이 회야의 하구 서생포다. 여기에 내륙으로는 외고산 옹기와 대운산 자락의 산림과 불교유적이 즐비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남창의 지세를 살펴보자. 남창을 하늘에서 보면 대운산과 달음산, 불광산이 병풍으로 에워싸고 있다. 

 산자락 곳곳에는 신라 고승 원효대사의 흔적이 남은 장안사 등 고찰이 널려 있다. 장안사 옆 척판암은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지로 유명하다. 이런 지세에 물산까지 풍부하니 어떤 기차가 그냥 통과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남창사람들의 자부심이다.  

 최근 울주민속박물관이 울주군 유물기증운동을 통해 울주 주민 엄주환씨로부터 ‘남창중수기문’ ‘남창상량문’을 기증받았다. 파평 윤씨 가문이 울주 온산 삼평리에 재실을 건축하기 위해 남창의 건물을 해체하면서 남창중수기문과 남창상량문을 발견했다. 남창(南倉)이 조선조 울산 남쪽에 있었던 세곡(稅穀)창고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이곳에 남창이 처음 설치된 시기, 그리고 중수 연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지료다. 이 자료를 근거로 살피면 남창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좌기청(4간), 색리간(2간), 고자간(3간), 서고(3간)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남창하면 첫째가 옹기다. 울산이 옹기의 고장으로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외고산 옹기마을은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온 옹기장들이 1950년대부터 옹기를 굽기 시작해 천혜의 옹기장소로 알려졌다. 그 이후 전국각지에서 350여명의 옹기 장인과 도공들이 모여 서울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외국에까지 옹기를 수출했고 1980년대에는 책자로 소개돼 외국 도예가들이 방문하는 등 세계화를 위한 기본 틀이 마련됐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사실은 비교적 현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남창의 옹기 그게 다가 아니다. 지금 남창고등학교가 있는 자리 인근에는 옹기골이라는 이름의 가마골이 조선조 말까지 연기를 올렸다. 울주 범서와 남창의 가마터는 옹기는 물론 각종 자기를 생산해 한양의 궁궐로 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만큼 이 땅의 흙과 바람, 그리고 장인들의 기술이 수천년 세월의 노하우를 가졌다는 이야기다.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의 첫 인상은 아름다운 예술품 하나 있고 없고에 따라 달라진다. 예술품 유·무에 따라 인문·지리적 가치가 달라지며, 그 지역 주민들의 품격까지도 달라 보이게 만든다. 서울 우이동 입구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 뿐인 옹기민속박물관이 있었다. 지금은 남창의 옹기박물관이 그에 못지 않다. 전국적으로 옹기는 이미 상업화의 바람을 타고 전통과 상업성을 조화시키는 여러 가지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 전라남도 보성, 경기도 용인이 자신들이 옹기문화의 선두라며 어깨를 으쓱댄다. 저마다 오랜 역사성과 인적 물적 자원을 내세워 옹기를 자신들의 브랜드로 하기위해 노력하지만 울산의 1만년 역사에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출발은 늦었지만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옹기장이 있었기에 원조자리가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 울산에는 옹기에 앞선 토기와 자기를 구운 가마터가 수십군데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울산과 언양이 분청사기의 가마터로 공식 등재돼 있지만 이 보다 휠씬 이전에 울산 곳곳에는 가마터가 존재했다. 울주 남창과 하잠, 언양 태기리는 물론, 지금은 수몰된 사연과 대곡댐 일대는 집단적인 가마터가 출토된 곳이다. 그래서 남창의 오랜 역사는 우쭐해도 될 만하다는 이야기다. 김진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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