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주부들을 대상으로 ‘듣고 싶은 말, 듣기 싫은 말’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분들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어 봤다. 그랬더니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서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남편 잔소리고, 두 번째는 시어머니 잔소리, 그리고 세 번째는 아는 척하며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겁니다" 그러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고 좋아하면서 심지어 속이 다 시원하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 어쩌랴. 오늘 필자는 세 번째인 ‘공자 왈 맹자 왈’을 하려고 한다. 주변에서도 보면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듣기 싫은 말도 들어야 세상이 편해지는데 그러지들 않아서 시끄럽다.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은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배우기 위해 낙양으로 가 그곳에서 노자를 만났다. 당시 공자는 30대 초반의 젊은이였고 노자는 80대의 노인이었다. 공자는 이미 높은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노자는 나라의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주나라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노자를 찾은 공자는 노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禮)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노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좋은 수레를 타고 다니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먼지처럼 세상을 떠돌 뿐이지요. 참으로 훌륭한 장사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는 다고 들었습니다. 이처럼 진정 덕이 있는 군자의 얼굴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먼저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잘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얼굴빛과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노자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공자 당신, 어지러운 세상 구한다면서 얼굴 알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진정으로 능력있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거든, 그리고 내가 가만히 보아하니 당신은 교만하고 욕심도 있어 보이는데 앞으로 조심해라" 이 정도로 정리가 된다.
만약 필자가 당시의 공자였다면 아마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화를 내며 ‘영감탱이’라고 욕도 했을 법한데 공자는 그러지 않았다. 역시 성인의 그릇이 다름을 본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자신이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자신이 능히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짐승은 능히 자신이 달아 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달아나는 것은 망에 걸리고, 헤엄치는 것은 그물에 걸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에 맞는다. 용이 됐을 때에야 비로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음을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내 오늘 노자를 보며 마치 용을 보는 것과 같았다" 역시 공자는 공자다. 이런 그릇이었기에 오늘날에도 ‘공자공자’하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전해지나 보다.
한마디 말과 글로 규정할 수 없는 넓고 복잡한 세상을 아우르며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이런 인간사에 인위적 개입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현세적 가치를 추구한 자가 바로 공자이다. 그 예를 하나 더 보자.
공자는 나이 35세에 노나라에서 발생한 내란을 피해 제나라로 갔다. 공자의 명성은 이미 제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터라 그곳에서 제나라 군주인 경공을 만났고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한 장면은 매우 유명하다. 경공이 "정치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했다. 매우 쉬운 한자의 나열이지만 그 뜻은 이렇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고 하겠다.
즉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 걸 맞는 역할을 하고 의무를 다 할 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리해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라고 부른다.
이 단순해 보이는 공자의 정명론을 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비해 본다. 오늘의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는 과연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고 그 의무를 다하고 있을까. 특히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은 어떤가.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나라를 올바르게다스린다는 말뜻 그대로 정치다운 정치를 하고 있는지. ‘무엇무엇 답다’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정치판은 ‘정치답다’가 아니라 ‘부끄럽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국민을 정쟁의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약속, 방금 한 말도 돌아서서 뒤집어 버리며 사악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정의를 입에 올린다. 정치인의 입은 세상 무엇보다도 무거워야 한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수시로 자신의 말과 신념을 바꾼다면 무엇을 믿고 그들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춘주전국시대 미생이라는 한 사내의 사연이 생각난다. 미생은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때 홍수가 나서 다리가 물에 잠기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리 밑에서 여인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익사했다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이다. 어찌보면 무모하고 미련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한 번 한 약속은 죽음으로라도 지키겠다는 그 결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평범한 범부도 자신이 한 약속을 목숨으로 지키는데 오늘의 우리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제발 국민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언제부턴가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돼버린 느낌이다. 말 바꾸기에 거짓 선동까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수시로 하는 그들이 부끄럽다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측은지심이 들 때도 있다. 다만 세상의 원리만은 지켜졌으면 한다. 그 세상원리가 무너지게 되면 난세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난세가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마주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꿈꿨던 무위사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노자의 무위사상을 물의 성질에 비유한 말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있다.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아서 물이 가진 유연함과 부드럽지만 강한 특징을 잘 표현한 말이다. 노자는 이런 점을 정치에 적용하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노자는 인위적이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다는 무위자연의 정치철학을 주장했는데 바로 그것은 스스로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너무나 인위적위고 작위적이고 심지어 사악한 거짓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가끔씩 이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하는 그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복잡한 세상사 모두 잊고서 구름에 달 가듯이 나그네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태풍처럼 밀려온다.
글을 마치려니 박목월 선생님의 시 <나그네>가 생각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최진구 울산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철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