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국왕인 정조는 국초의 세종대왕과 비길만한 훌륭한 군주였다.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그것도 할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현장을 지켜봤던 정조는 연산군이 될 수도 있었다.
영조가 죽고 즉위한 정조는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노론 대신 앞에서 일성을 던져 노론 대신들의 넋이 반쯤 나가게 했다. 그렇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의문을 일소에 부치고, 민생 해결 등 국정 운영에 앞장을 섰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어질고, 문무겸전(文武兼全)한 훌륭한 교양을 갖춘 철인군주(哲人君主)로 성장한 왕이 정조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 병란(兵亂)이 없었던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태평성세(太平盛世)였다. 농사꾼은 해마다 풍년으로 논둑에서 즐거워하고, 장사꾼은 장사가 잘돼서 거리에서 노래했다고 판서 권상신은 ‘은암아집도’의 찬문(贊文)에 기록할 정도로 평화와 번영을 누린 시기였다.
조선시대 3대 풍속 화가로 알려진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은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야기된 정조시대의 풍요로운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는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풍년으로 웃통을 벗어젖히고 흥겨운 몸짓으로 신이 나게 타작하는 농민과, 감독하는 마름과 지주(地主) 노인의 여유롭고 느긋한 자세를 풍자한 타작도(打作圖)를 통해, 김홍도와 김득신은 정조시대의 생기가 넘치는 평온한 사회 분위기를 알려주고 있다.
혜원 신윤복은 선술집 풍경인 주사거배(酒肆擧盃)를 통해 주막의 대청과 술청에 놓인 오층 찬탁 및 커다란 뒤주와 함께 배열된 삼층 찬장과, 백자 술그릇에서 서민의 넉넉한 살림살이를 잘 묘사했다. 특히 주모가 여성의 비싼 사치품인 가채 머리로 치장하고, 객인들의 깔끔하고 맵시 있는 옷차림에서 부유했던 정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의 금주령 정책을 풀 수 있었던 것은 발달 된 이앙법(移秧法) 농업기술로 쌀의 생산량을 배가 시켰기 때문이다. 물이 중요한 이앙법을 위해 정조는 저수지 수축(修築)을 위한 제언절목(堤堰節目)을 반포할 정도로 수리시설에 관심을 가짐으로 농민들은 수익을 크게 낼 수있었다.
숙종 때 공물(貢物)을 미곡(米穀)으로 대납하게 하는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관부(官府)의 수요상품을 조달하던 어용(御用)상인인 시전상인(市廛商人)은 정부의 비호 아래, 한양에서 민간 상인의 장사를 금지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란 특권을 누리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정조는 남인 출신 좌의정 채제공을 앞세워 시장을 독점하는 시전상인의 카르텔인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년)을 시행케 했다. 이로 인해 난전상인(亂廛商人)인 사상(私商)은 한양, 한강을 통한 활발한 상행위로 시전상인과 경쟁하면서 조선왕조의 상업 발전을 촉진 시켰다.
수원 성곽인 화성(華城)을 쌓을 때 모든 인부에게 노임을 지불하고, 완공 직전에 농사에 지장이 없게끔 공사를 미룬 정조는, 능원 참배라는 형식을 취해 백성의 여론을 살폈다. 이와 함께 백성의 고통을 들어주는 개선된 상언(上言) 제도로 민원을 해결하는 등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실현한 군주였다. 훌륭한 솜씨로 완공을 본 화성(1796년)은 정조시대의 국력과 높은 기술 및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됐다.
애민군주(愛民君主)인 정조의 치세 기간 중 사회는 대체로 안정되고 태평성세를 이뤘다. 그리고 김홍도 등 예술가들이 진경문화(眞景文化)를 펼칠 수 있도록 규장각을 중심으로 후원해 조선 후기문화는 정점을 이뤘다.
정조를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이재명 대통령은 갑오 동학 농민들이 "정조 당시 체제로 돌아가자"고 왜 부르짖었는지를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한다. 그리고 정조가 세운 수준 높은 문화국가 건설에 전력한 업적을 법고창신(法古創新)해, 한국을 기술과 문화의 선진국으로 잘 이끌어줄 것을 기대한다.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