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골은 경주 남산의 대표 계곡 중 하나인 용장골의 지류로, 고위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짧은 골짜기이다. 비록 전체 길이는 1㎞도 채 되지 않는 아담한 규모지만, 골짜기 곳곳에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바위들이 줄지어 있어, 남산의 다른 어떤 계곡보다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바위들에는 애틋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며, 자연경관 이상의 역사적·정서적 의미를 지닌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열반(涅槃)이란 불교에서 번뇌와 고통을 완전히 소멸시킨 최고의 해탈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마치 바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는 것처럼, 불타는 욕망과 번뇌를 지혜의 바람으로 꺼버려 완전한 평화와 자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 열반골의 전설
오랜 옛날, 신라에는 한 고위 대신인 각간(角干)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남다르게 고운 마음씨와 눈부신 미모를 지닌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꽃다운 나이가 되자,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하늘에서 꽃구름을 타고 내려온 비천(飛天)과도 같았고,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권력과 부를 앞세워 끊임없이 구애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인생의 짐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그녀는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고, 고요한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사랑스러운 부모님의 애틋한 정과 사람들의 존경, 찬란한 머리 장식과 화려한 옷가지도 모두 뒤로한 채, 그녀는 오직 청정한 수행의 길을 찾아 집을 떠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경주 남산의 깊은 골짜기, 열반골이었다.
금빛으로 수놓은 화려한 옷과 은빛의 과대(銙帶)며 요패(腰佩)도 다 벗어던진 그녀는 잿빛 먹물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아무리 외면을 바꿔도, 꽃 같은 젊음에서 풍기는 살냄새는 감출 수 없었다. 짐승들은 그녀의 향기에 이끌려 길을 막고 으르렁거리며 위협했지만, 처녀는 죽음을 무릅쓰고도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산속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맹수들의 위협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도 부처님의 이름을 외며 꿋꿋이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던 계곡을 지나, 부처님의 세계로 향하는 산등성이에 다다르게 됐다. 그곳에서 한 노파가 그녀를 맞이했고, 그 인도로 처녀는 고개 너머 천룡사로 향하게 된다. 바로 그곳은 하늘 위 열반의 세계였다. 그렇게 그녀는 온갖 번뇌를 씻고 열반에 들며, 마침내 보살이 됐다고 전해진다.
# 열반골의 바위 전설

이 감동적인 전설은 열반골 곳곳에 남겨진 바위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열반골 입구를 지나 조금 들어가면, 개울 동쪽 기슭에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하나 보인다. 바로 전설 속 낭자가 속세의 화려한 옷을 벗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는 갱의암(更衣岩)이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양이 형상을 닮은 묘암(猫岩), 코를 내민 듯한 개바위, 날렵한 여우바위, 육중한 산돼지바위, 귀여운 작은곰바위, 구불거리는 뱀바위, 익살스러운 도깨비바위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마치 그녀가 지나간 길을 짐승들이 상징적으로 지키고 있는 듯하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열반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큰곰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측면에서 보면 사자처럼 보이고, 다른 각도에서는 앞발을 든 거대한 곰처럼 보인다. 그 웅장한 존재감은 열반골의 영적 깊이를 상징하듯 위풍당당하다.
이 큰곰바위 아래에는 지금도 작은 암자인 관음사(觀音寺)가 자리하고 있어, 옛 전설을 기억하고자 찾는 이들의 발길을 조용히 맞이한다.
# 관음사와 석탑
경주 남산의 깊은 품, 열반골 골짜기 끝자락. 고요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암자 하나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관음사이다. 지금의 관음사는 1950년대 이후 조성된 암자로, 규모는 작지만 시간이 켜켜이 쌓인 풍경을 담고 있다. 주변에는 오래된 석탑과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신라 시대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음사의 요사채 한켠, 마치 무심한 듯 자연석 위에 쌓아올린 탑신부의 지붕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총 4단과 3단의 탑신이 뒤섞인 듯 층을 이루고 있으며, 원래는 9세기 후반 이곳에 세워졌던 석탑의 일부로 추정된다. 탑의 하단부는 사라지고 상층부만 남은 상태지만, 오래된 돌 사이로 풍화의 흔적이 묵직한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관음사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큰곰바위’ 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하늘을 떠받치듯 서 있다. 높이 10m에 이르는 이 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사자처럼도, 곰이 앞발을 들고 선 형상처럼도 보인다. 바로 그 바위 아래, 관음사는 마치 자연의 보호 아래 자리한 은신처처럼 장엄하게 앉아 있다.
"열반골의 전설에서 할머니를 만나 그의 안내로 고개를 넘어 천룡사에 이르게 되니, 그것이 바로 하늘에 떠 있는 열반의 세계였다" (천룡사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