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왔다. 텃밭 상태가 어떤지 살짝 점검만 하러 나갔다가 봄볕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눌러앉아 버렸다. 앉은 김에 새 흙이랑 거름 조금 섞어서 굳은 흙이나 갈아놓고 가야지 했는데 어느샌가 돌멩이도 골라내고 엉켜있는 풀뿌리들도 뽑아내고 있다.
‘어이, 봄볕, 네 녀석 때문인 거다.’ 하고 혼잣말하며 올해 텃밭 농사도 잘 되게 해달라고 누구에게랄까도 없이 빌고 있는데 손에 무언가가 잡힌다.
이게 무언가. 무 아닌가. 작년 가을 농사 때 뿌려놨던 무씨가 겨우내 죽지도 않고 용케 살아있었던 것이다.
초록 잎사귀 아래로 오동통하게 뻗은 뽀얀 몸통, 초록과 하양 사이의 수줍은 연두며 흙 속으로 파고들며 끈질기게 제 몫의 삶을 요구했을 잔뿌리들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무가 하나 내 손바닥 위로 올라와 있다. 다만 그 완벽한 무는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을 뿐이다.
그 작은 몸뚱이로 어쩌자고 그 추운 겨울을 견뎠는지, 어쩌자고 그 좁고 어두운 땅에서 제 모양대로 살아내겠다고 버텼는지, 어쩌자고 ‘나는 무다.’ 그리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는지 한참을 묻게 된다. 실하게 익을 만큼의 해도 들지 않는 상자형 텃밭에서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긴긴 겨울 방학 동안 이 녀석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지내온 걸까.
효율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실패작'이다. 학교 텃밭이니 내다 팔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한입 베어 먹을 것도 없는 무라니. 그간의 노력이 아깝고 들인 예산과 땅이 아까울 뿐인 '규격 외'의 생산물임이 틀림없다. 제때 자라서 표준규격에 맞게 세상으로 나왔다면 식탁의 풍성한 재료가 됐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도마 위에 올라갈 기회는 꿈도 꾸지 못할 이 작은 것이 내 눈에는 그 어떤 실한 무보다 더 무 같다.
무를 크기로 가늠해 먹기 좋게 키우는 일은 인간의 욕심일 뿐 무의 본질이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먹힐 만한 무가 되기 위해 튼실한 살집을 키우는 대신, 오로지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한 무. 꽁꽁 언 흙 속에서 뿌리를 뻗어가며 기어코 자기 자신을 갖춰낸 무. 녀석은 자기에게 주어진 땅과 시간 안에서 가장 자기다운 자기를 완성해 낸 것이다.
이 손바닥 위의 경이는 사실 내가 교실 안에서 숱하게 봐온 풍경이기도 하다. 남들이 잘 알아챌 수 없는 곳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 세상이 정한 '적기'와 '표준'의 언저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이 작은 무다.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한 무언가가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익어가고 있다.
교육은 세상에서 요구하는 규격대로 아이들을 맞춰서 키워내는 공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완성하고 있는 작은 씨앗들을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흙 속의 작은 움직임들을 알아채고 그 앙증맞은 성취 뒤에 숨겨진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봐 주는 일 말이다.
올해 우리 학교의 텃밭 농사는,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의 하루하루는 내 생애 처음 만난 이 '어쩌자고' 덕분에 더 깊고 풍성해질 것 같다. 이은영 울산행복학교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