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오고야 말았다. 늘 가슴이 답답했는데 울산불교문인협회에서 길을 내었기에 동행을 했다.
중국은 여러 번 갔다. 아니, 혼자서 2년간이나 살았다. 그러나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북파산문으로 백두산을 갔으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그를 찾아가지는 못했다. 그것이 큰 후회가 됐는데 이제야 그를 만나려 간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곧 우리를 연길비행장에 내려줬다. 연길공항은 군사훈련 공항이라서 잘못되면 오랜 시간을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한다고 한다. 물론 공항의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바로 나왔다. 공항을 나오자 밖에는 봄비가 내렸다. 비옷을 꺼내 입으면서 이 비가 참으로 반가운 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은 연길민속촌을 관광했다. 우리와는 계절의 차이가 있는지 4월 말인데도 여기저기 진달래꽃이 피어 있었다. 연길 사람들은 진달래꽃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진달래광장이 있었다. 매화꽃도 만개를 해서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줬다. 민속촌은 마치 우리의 용인민속촌과 같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는 사진 기사를 대동하고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는데 열중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최근 중국여성들에게 한복이 인기가 좋다고 했다. 입구에는 한복 대여점만 보였다. 뜻밖에도 타국에서 예쁜 한복을 보니 나의 마음도 푸근해졌다.
다음날, 연길에서 차로 삼십 분 쯤 달리자 용정에 도착했다. 용정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 그렇게 있었다.
용정이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왔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우리 민족이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던 곳이다. 용정에 오며는 누구나가 독립군이 된다. 일송정이 있고, 해란강이 있고, 민족의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다.
그를 만나려고 복원된 생가로 갔다. 찾아가는 길바닥에는 ‘시인의 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큰 돌에다 ‘중국 조선족 유명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비석이 있었다. 잠깐 묵념을 하고는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구에 작은 안내소에 안내원 1명이 상주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그가 쓴 아름다운 시들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수양버들이 반갑다고 하늘하늘 춤을 췄다.
지붕이 기와로 돼있고 일반 집 보다는 좀 더 큰 집이었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집은 정물화 같았다. 그렇게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의 외로움을 빈 집은 알고 있는 듯 했다.
일본 유학을 그렇게도 만류했던 어머니의 손길을 떨치고 어찌 갔을까. 그의 죽음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광복을 불과 반년을 앞에 둔 것이고, 또 하나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이용당하고 스물 일 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라리 어머니의 말에 따라 유학을 가지 않고 이 땅에서 더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집 옆에는 작은 자료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잘 생긴 한 청년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사진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의 윤동주’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저렇게도 멋진 청년이 그렇게도 어이없이 간 그 시간이 정말로 원망스럽다.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안타까운 젊은이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인의 집
서시(序詩)를 만나려고 먼 길을 달려왔다
시인은 가고 없고 빈 집이 지키는 꿈,
그 꿈 속 수양버들이 머리 풀고 반기네 김봉대 울산아동문학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