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백운암과 양조암골 폐사지는 고위산 남쪽에 자리한 사찰 유적으로, 남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와 절터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백운암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지금의 폐사지에는 고위산 동쪽 아래 바위 능선을 배경으로 한 돌축대와 건물 터가 남아 있으며, 곳곳에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 당시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도 이곳에는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백운암은 말 그대로 '흰 구름 위에 떠 있는 암자'라는 뜻을 지닌다. 또한 서쪽으로는 천룡사지와 인접해 있으며, 백운재를 넘으면 천룡사지와 틈수골, 용장골로 이어진다. 북·동쪽으로는 고위산과 금오산, 언양재, 칠불암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남 남산에서 백운암으로 이어지는 주 계곡인 백운계곡 초입에는 백운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백운계곡의 지류인 열암곡(새갓골), 양조암골, 침식곡의 물줄기 또한 모두 이곳으로 모여 동남쪽을 향해 흐른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의 기록에 비춰 보면, 옛 서라벌(계림)의 입장에서는 이 물길이 역수(逆水)에 해당하는 셈이다.

 남 남산 일대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사찰과 탑, 불상 유적이 적지 않으나, 오늘날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유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열암곡 석불좌상과 침식곡 석불좌상은 모두 목이 잘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양조암골의 석탑들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훼손됐다. 또한, 폐사지에는 무덤들이 들어서 옛 절터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 탄압과 억불 정책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개불위사이안(開佛爲死而安)"이라 했다. 곧 "부처를 물리치면 죽어서도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불교 배척의 정당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억불의 역사 속에서 남산 곳곳의 사찰과 불상들은 훼손되고 잊혀 갔지만, 백운암과 양조암골 일대에 남아 있는 돌 하나, 기와 조각 하나에도 천 년 전 불국토를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숨결은 여전히 배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불교에 현혹됨이 사생설 (死生說 )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선생은 스스로 불교를 물리치다가 죽어도 편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을 제거하게 한 것으로서, 사람에게 보인 뜻이 또한 깊고도 간절하다.

 사람들이 불교에 현혹됨이 사생설 (死生說 )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선생은 스스로 불교를 물리치다가 죽어도 편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을 제거하게 한 것으로서, 사람에게 보인 뜻이 또한 깊고도 간절하다 .

 선생은 스스로 불교를 물리치다가 죽어도 편하겠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불교에 현혹됨이 사생설 (死生說 )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선생은 스스로 불교를 물리치다가 죽어도 편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을 제거하게 한 것으로서, 사람에게 보인 뜻이 또한 깊고도 간절하다 .

 백운암은 신라시대 백운곡 제3사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남·남산 열암곡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첫 번째 계곡이 열암곡(새갓골), 두 번째가 양조암골, 세 번째가 침식곡이며, 그 가장 안쪽에 백운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운암은 더없이 좋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앞쪽으로는 천왕지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마석산이 바람을 막아 준다. 또한, 오가리고개와 마석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이 일대를 휘감아 흐르니, 마을 이름 또한 백운마을 또는 별내(星川)라 불리고 있다.

 현재의 백운암은 종단 소속 사찰이 아닌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뛰어난 입지와 조용한 수행 환경 덕분에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으며, 고시 공부를 하는 이들이나 수행을 위해 찾는 조계종 스님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백운암의 주요 문화재로는 백운암 목조보살좌상과 복장유물이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전주 관음사에 봉안돼 있었으나 2018년 백운암으로 기증됐다고 전한다. 복장유물은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각종 유물로, 불상의 제작 시기와 조성 배경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목조보살좌상은 광해군 5년(1613)에 조각승 천진(天眞)을 비롯해 응원(應元), 쌍옥(雙玉) 등 15명의 조각승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턱이 각지고 넓은 장방형이며, 입체감은 비교적 절제되어 있다. 화려한 영락장식이 몸 전면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발 발가락이 옷 속에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 있는 표현, 대의(大衣)가 대좌를 덮는 상현좌(裳懸座)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 등은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특징으로 평가된다.

   비록 규모가 크지 않은 암자이지만, 백운암은 신라의 옛 절터 위에 자리해 천 년의 세월을 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수행과 기도의 도량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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