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헌은 조선시대 울산의 상징적 공간이다.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지역 안팎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주변 일대 재개발이 진행되면, 울산읍성 상당 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면 동헌은 더욱 아름다운 보석이 돼 빛을 낼 것이다.
이에 즈음해 동헌이 활발하게 기능하던 18세기 울산을 들여다보자. 당시 울산에는 좌병영, 울산도호부, 언양현, 울산목장에 각각 동헌이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동헌은 한 곳뿐이며, 한때 일학헌(一鶴軒)으로 불렸던 지금의 반학헌(伴鶴軒)이다. 이 건물을 크게 보수하면서 쓴 <일학헌중수상량문>이 1981년 당시 정비 중에 발견됐다. 27세에 급제할 정도로 수제였던 유한위 부사가 회갑이 돼 지은 글이며, 수고한 30명의 명단을 함께 실었다.
먼저 시대를 보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고, 지방은 중앙과 주민 가운데서 일한다. 시간을 정하는 하늘은 하나인데, 이름을 붙이는 대리인들은 지금보다 많았다. 때는 정조 11년(1787)이다. 공식 연호인 청 건륭 52년 대신 명 숭정 기원후 세 번째 정미년으로 기록했다. 17~18세기 울산에는 아직 전쟁의 악몽이 남아있었다. 왜란으로 폐허가 된 시설들을 복구했지만, 물자는 여전히 부족했다. 좌병영 판관의 얼안당(1602)과 울산향교(1652), 그리고 구강서원(1678)을 마련한 다음에야 부사를 위한 일학헌(1681)을 지었다. 이후 중건(1763) 후 반학헌으로 개칭했고, 다시 일학헌으로 바꿨다. 상량문을 보면 위엄을 갖추되 최대한 예산을 아끼려 공사 규모를 읍인 및 장인들과 사전에 논의했고, 기왓장을 재사용했다는 사실까지 써넣었다.
당시 울산도호부는 지금만큼 자율성이 없었다. 동헌 바로 옆에는 더 큰 규모의 객사를 둬 큰 손님이 오면 모셔야 했고, 중요한 날마다 궁궐을 보며 망궐례를 지냈다. 동쪽에는 세금을 더 많이 쓰는 좌병영이 있었다. 좌병사는 초창기 부사를 겸임했고 크고 작은 일들은 판관을 보내 처리했다. 향촌에서는 좌수와 별감이 보좌하는 듯 감시했다. 백성들은 뒷받침해야 할 관청이 너무 많다며 병영을 옮겨달라고 계속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헌을 중수하고자 하니 시기를 살펴야 했고, 규모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위엄은 있어야 하되 좌병영을 넘지 않아야 했고, 애민을 늘 생각하되 있어야 할 공간은 마련해야 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일학헌(내헌) 중수 배경을 설명하며, "우뚝하던 얼안당(외헌)은 허물어져 편액 걸린 문미만 남았고, 영각(鈴閣)은 지어진 때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전 판관 시절 동헌이 없어지고, 영각 같은 부속건물도 많이 없어졌으니 아직 쓸만한 일학헌이라도 고치자는 뜻이다. 눈물겨운 대목이다.
상량문의 핵심은 여섯 방향을 묘사하는 육위송(六偉頌)이다. 일학헌 상량문에서는 동쪽의 아침 해와 증성(학성), 서쪽의 은월봉과 푸른 대숲, 남쪽의 태화강 하구 파도와 쌀 싣는 배, 북쪽의 치술령과 그 너머 궁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로는 별자리 영실, 아래로는 여염집들을 묘사했다.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성들이 몽둥이 들고, 빼앗긴 쌀을 찾으러 관아를 습격했던 을해민란(1875) 장면과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현재 울산은 동헌이 바라보던 시야를 훨씬 넘어섰다. 동해 건너 미국은 이웃 중국과 경제전쟁 중이며, 영남알프스 건너 유럽은 한국문화를 동경한다. 남극기지를 건설했던 울산의 조선이 핵잠수함 건조를 꿈꾸고, 오토밸리는 북극항로 수출길을 기다린다.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이 우리은하를 훨씬 지나 빅뱅 초기 은하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삶과 건강은 디지털 데이터로 들여다본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폭발적이고, 울산의 상대적 위상과 역량은 조선시대보다 월등히 높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환경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울산 내부 시민사회의 감시와 요구는 갈수록 매섭다. 참으로 도시 하나라도 태평한 세상을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옛날 일학헌을 수리하는 데만 해도 얼마나 고민하고 또 힘을 합쳤던가? 그래야 일학헌을 중수한 사람들이 기원했듯이 폐부가 되지 않고 더 큰 대도로 나갈 수 있다. 상량문에서 말하듯이 이뤄진 건 반드시 무너지지만, 무너진 게 다시 서는 건 운이 따라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