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알림에 ‘배송이 완료됐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이 떴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아담한 상자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언박싱용 칼로 조심스레 상자를 봉쇄하고 있는 테이프를 떼었다. 상자 안에는 신문지와 완충재로 빈틈없이 감싼 제철 먹거리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귀촌한 지인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다.
깔끔한 지인의 세심함이 메마른 마음을 적신다. 깨지기 쉬운 것은 한 번 더 감싸고, 상하지 않도록 비닐을 덧씌운 흔적이 역력했다. 골판지 겉에 쓰인 ‘남해’라는 글이 언뜻 눈에 띄었다.
절대 농사를 짓지 않고 꽃만 가꿀 거라고 했던 지인은 예상과 달리 남해로 내려가 농작물을 정성스레 가꿨다. 채소 옆에는 작은 메모 한 장도 넣어 두었다.
‘건강 잘 챙기기고, 맛있게 드세요’ 불과 두 줄 남짓한 글이었지만 그 짧은 문장은 긴 편지보다 깊은 울림을 줬다. 손끝으로 눌러 쓴 글씨에는 "잘 지내고 있지?"라는 안부와 "보고 싶다"라는 그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어릴 때 행동이 재발랐던 나는 집 찾기와 길 찾기의 달인 수준이었다. 친척들이 집을 찾기 힘들면 나를 앞세워 집을 찾아다녔다. 여름철이면 계절 과일 한 바구니를 들고 친척 집을 찾았고, 김장철이면 김치를 나누기 위해 골목길을 오갔다. 대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맞아 주던 얼굴이 있었고, 냉차 한 잔과 함께 근황을 풀어냈다. 물건보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제는 택배가 그 길을 대신한다. 사람은 오지 못해도 마음은 상자에 담겨 온다.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문 앞까지 찾아오는 정성이다. 편리한 시대가 인간적인 온기를 빼앗았다고들 하지만, 나는 가끔 택배 상자를 열며 그 말이 꼭 맞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정성은 방법을 바꿧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흔히 선물의 값으로 마음을 가늠하려 한다. 그러나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비싼 물건보다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뭉클한 기운을 받았을 때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내 이름을 생각하면서 필요한 것을 헤아리고, 작은 메모 한 장을 써서 넣은 그 마음이 선물의 진짜 가치가 된다.
지인이 보낸 상자 안의 채소를 비우고도 골판지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보내온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가 보내셨던 꾸러미가 떠올랐다. 된장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반찬, 신문지에 정성껏 싼 나물, 계절마다 달라지던 햇곡식…. 그 꾸러미를 풀어 놓는 순간 집 안은 고향이 됐고, 어머니의 사랑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택배라는 이름으로 달라졌지만, 마음을 담아 보내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다. 바쁘다는 이유로 안부를 미루고, 보고 싶다는 말을 삼키기도 한다. 그럴 때 작은 택배 하나가 관계의 끈을 이어 준다. 상자 하나가 건너온 거리는 수백 킬로미터일지 모르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가깝다.
요즘은 무엇이든 빠르게 배송된다. 하루 만에, 때로는 몇 시간 만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배송도 사람의 정성까지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정성은 시간을 들여야 생기고, 마음을 써야 완성된다. 그래서 택배의 진짜 내용물은 상자 안의 물건이 아니라 보내는 이의 따뜻한 마음이다.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상자는 하루의 풍경을 바꾼다. 그것은 물건을 받은 날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다. 거리에 택배 차량이 달리고 있다. 그 안에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보이지 않는 정성이 함께 달리고 있다. 고은희 울산문인협회 회장ㆍ북구생활문화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