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도회에서 살면서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는 일은 추위를 피하는 일보다 어렵다. 피서라는 말은 자주 사용하면서도 피한이라는 말은 생활 속에서 잘 쓰지 않는다. 추위도 피해야 할 대상이지만 대피할 방법은 수없이 많다. 두꺼운 옷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한여름의 더위는 피하고 막을 방법이 도회지에서는 마땅치가 않다. 에어컨이 있는 식당이나 카페로 들어가야 한다. 모두 비용이 발생하는 도회의 피서 장소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고 지내는 일도 비싼 피서 방법이다.

  예로부터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은 있어도 더위로 생명을 잃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다. 파리나 런던과 같은 유럽 선진 도시에서도 더위로 생명을 잃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말이다. 여름에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지구 환경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생활 속의 불편을 감수한다는 강한 자부심이었다.

  독일 남부 도시 만하임에서 여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강과 숲이 가까이 있는 도시라 여름에는 모기가 들끓었다. 그래도 식당이나 호프집은 에어컨 없이 문을 열어 놓고 손님을 맞았다. 앵앵거리며 모기가 날아다녀도 태연하게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그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모기향이라도 피우고 싶었다.

  동네 야외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모기와 함께 흔들림 없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흔한 선풍기 하나도 없었다.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동양의 이방인은 결국 손으로 모기를 쫓았다. 딱딱거리는 손바닥 소리가 거슬렸는지 아니면 낯선 이국인이 안타까웠는지 백발의 할머니가 다가왔다. "젠틀맨 이것을 사용하세요." 할머니가 내민 것은 바르는 모기 기피제였다. 타인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이 관여하는 마음 씀씀이는 동양의 할머니나 서양의 할머니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모기 기피제는 여름날의 필수품이었다.

  우리도 옛날에는 자연 속에서 여름을 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름 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더위에는 바람이 부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산바람이라도 좋고 강바람이라도 좋았다. 바닷바람이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바람 노래가 실려 있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불과 한두 세대 전의 이야기다.

  지금도 바람을 찾아 산과 바다로 떠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자연 속의 바람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도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풍이 귀하기도 하지만 대체 수단인 인공 바람이 많이 생겨났다. 선풍기 바람이나 에어컨 바람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바람이다. 선풍기나 에어컨 없는 도시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두꺼운 건물 벽과 기후변화를 염려하는 시민 의식으로 버티던 유럽도 살인적인 폭염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에어컨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에어컨이 최고급 상품으로 평가된다고 하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지구 환경을 걱정하면서 생활의 불편을 참아내던 시민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의지로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시민 의식의 상징처럼 남아 있던 유럽인들의 여름나기가 에어컨 바람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작은 변화가 아닌 것처럼 들린다. 북극의 큰 빙하가 녹아내렸다는 소식보다 더 심각한 경보처럼 들린다.

  태화강 강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한다. 화장실을 사용하는 짧은 시간에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다. 가끔 찾아오는 시민들을 위하여 에어컨은 혼자 돌아가고 있다. 공공기관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하지만 약간은 불편한 마음도 든다.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한때는 모든 상품의 생산이나 서비스의 공급에 붙이던 관형어가 있었다. ‘지속 가능한’이라는 한마디로 환경에 대한 걱정을 대신했다. 이제는 사라진 말이 됐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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