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6개월. 숫자로만 보면 긴 세월이지만, 막상 뒤돌아보면 한순간처럼 지나간 시간이다. 교사라는 이름으로 교정에 첫발을 내디딘 날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정든 학교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낸 세월, 수많은 제자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 때로는 교육 현실의 벽 앞에서 고민하고 좌절했던 시간까지….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든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퇴직을 앞두고 요즘 나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직장을 떠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어쩌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고, 다양한 정보를 찾아보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퇴직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60세를 인생의 황혼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건강과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60대의 삶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정년이라는 제도적 기준 때문에 직장에서는 물러나지만, 그 사람의 경험과 역량, 열정까지 정년을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쌓아온 전문성과 삶의 경험은 새로운 사회적 자산이 될 수 있다. 교육자는 교육 현장에서, 기술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공직자는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인은 경영 경험을 활용해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이제 내 나이에 무엇을 하겠어.” 이 한마디가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될 수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유명한 말 가운데 “해봤어?”라는 질문이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던졌던 이 짧은 질문은 퇴직을 앞둔 우리에게도 의미가 크다.
“나이가 많은데 할 수 있을까?”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까?” “퇴직하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해봤는가?” 해보지도 않고 나이와 환경을 이유로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순간, 새로운 인생의 문도 함께 닫히고 만다. 퇴직 후의 삶에는 정답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경험과 역량을 어떻게 새로운 가치로 연결하느냐이다.
배움과 도전에는 정년이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새로운 도전을 위한 가장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도 좋고, 자격증에 도전해도 좋다. 강의를 해도 좋고, 봉사활동을 해도 좋다.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역할을 찾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이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이 마음가짐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삶의 표정은 달라진다.
퇴직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직함이다. 수십 년 동안 불렸던 직책과 명함, 조직에서의 역할은 어느 순간 내려놓아야 한다. 처음에는 허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상실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직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위와 경력에 기대기보다 무엇이든 처음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퇴직 후에는 반드시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걷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다. 퇴직 이후의 삶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다. 36년 6개월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이제 나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다. 물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익숙했던 일상과 직장을 떠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설렌다. 36년 6개월 동안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했던 경험을 이제는 학교 밖에서 다시 나누고 싶다.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나의 도전이 또 다른 퇴직자에게 용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제2의 인생은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박봉철 울산교총 상임고문·본지 독자권익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