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당시 성 쌓기를 위한 노동은 물론, 전복 등의 진상품 문제 때문에 울산 백성들과 관리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러스트=곽영화.

울산 농부들에게 울산읍성을 쌓는데 참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일꾼으로 동원되는 날은 논밭 넓이에 따라 배정됐다. 토지 8결(結)마다 한 사람의 장정이 필요했는데 한 해에 엿새 일해야 했다. 오래전부터 성 쌓는 일의 노동 강도는 악명 높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성종은 1476년 천천히 할 것을 지시했다. 쉬엄쉬엄 매년 일정한 높이만큼 성을 쌓는다면 문제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울산사람들은 나아가 성을 쌓지 않을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때문에 성은 해가 바뀌어도 2~300척도 쌓지 못했다.

이에 성종은 공사기간을 정하고 이웃고을의 도움을 받을 것을 지시한다. 7개월 후 1477년 10월 29일 성이 완성됐다. 이웃고을의 도움을 받아 한 달에 500여 척에 달하는 성을 쌓아 높이 15척, 둘레 3,639척의 성을 만들었다.

울산사람들이 나라에 바친 것은 또 있다. 울산 전복은 달고 연하기로 유명했는데, 크기가 작다는 점 빼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크기 때문에 전복 올리기를 꺼려한 울산 사람들이 사천이나 제주 등 다른 지역에서 전복을 사와 진상을 올렸다. 높은 원가와 배송비를 백성들이 부담하면서까지 진상을 올린 것이다.

1793년 5월 27일 이 문제가 의논돼 크기가 작더라도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공물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려졌다. 크기가 중요하지 않을 만큼 울산 전복의 맛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나라가 벼슬, 역(役)면제, 포상금 등을 내걸며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으니 ‘심중청’(深重靑)이었다. 심중청은 구리에서 추출되는 검푸른 빛깔의 천연 안료로, 주로 목조건물에 색깔을 입히는데 사용했다. 간혹 조선에서 발견되면 즉시 진상해야했다. 성종 24년 1493년 울산에서 심중청이 채취됐다. 관찰사 이극돈이 올린 보고였다. 이때부터 채취 금지령이 내려졌다. 만일 진상품으로 지정되면 지속적으로 올려야 했으니 울산사람들은 이왕 발견된 거 풍부하게 나오길 바랐다.

제때 진상품을 올리지 못하는 책임은 각 지방의 부사와 아전 백성들에게 돌아갔으며, 이로 인해 여러명의 울산부사가 경질되기도 했다. 진상품이 도착하지 않아서, 진상품의 상태가 나쁘다는 이유 등. 이처럼 까다로운 진상품 올리기는 관리와 백성 모두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