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은 아편전쟁, 청·일전쟁으로 무너졌다. 그런데 일어섰다. 누가 어떻게 일어 세웠는가? 중국 대륙 중앙을 관통하는 양쯔강의 넓은 하구(河口)는 태평양과 접하고 있다.
근대 중국은 해금(海禁)정치를 하고 무역을 제한했지만, 양쯔강 하구의 상하이에서만은 일본,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하며 살아가는 2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활기찬 항구(港口)도시로 인정했다. 양쯔강 하구에 위치한 상하이항에서는 ‘정크선(Junk)’이라고 하는 수백여척의 중국 범선들이 화물을 싣고 끊임없이 입출항(入出港)함을 용인한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부터 1949년 공산당 집권 100여년동안에 영국·일본 등 외세에 시달렸지만, 상하이만은 교통망과 가스 공급망이 구축됐고, 해안(海岸)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못지않은 스카이라인까지 갖춰가면서 1930년대 세계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대공항 시대에도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 이런 상하이의 건설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아편전쟁, 청·일전쟁, 국공내전(國共內戰), 모택동의 공산당 집권의 역경속에서도 서양 자본가를 대표하는 유대계 서순(Sassoon)가문과 커두리(Kadoorie)가문이 상하이항을 계속 건설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 상하이 항구가 역경의 중국을 근대화(近代化)시킨 것이다.
요컨대 근대 중국은 명(明)나라가 만들어 낸 해금(海禁)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상하이에서는 유대인 진출 용인으로 변칙적인 발전을 일으킨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영국의 식민지 홍콩(항)도 유대인들의 활동으로 세계를 향한 무역 창구가 됐다. 당시 중국 대륙은 모택동의 공산주의가 설쳤다. 그러나 홍콩항도 상하이항처럼 서방 국가들의 기업들과 거래하고 외환을 벌어들여 중국의 성장에 이바지했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배 지역이었지만, 자유시장경제와 영국 식민지배를 혼합해 무역(경제)을 일으키면서 외환거래중심도시로서 유지했다.
마침내 홍콩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울 정도로 번창한 도시국가가 됐다. 그리하여 홍콩은 항구(港口) 도시국가인데도 당시 무역규모 면에서 세계 25위였다. 1970년대에 홍콩의 1인당 소득은 중국(본토)보다 10배나 높았다.
그럼, 유대인들은 어떻게 상하이와 홍콩 등지에 유입됐는가? 1938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이 상하이에 입항했다. 처음에는 100여명 남짓했으나 1939년에 이르자 1만명으로 불어났다. 마침내 상하이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유대인을 상하이에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공표한다.
이 당시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은 1만8,000여명이었다. 그런데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이 절정에 이를 적에 상하이에 파견된 독일 나치 대령 요제프 마이징거가 유대인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서 몰살시키자고 일본 측에 제안한다. 이 제안에 일본 이무스카 대령은 ‘살려서 인질로 삼는 편이 더 낫다고’ 독일 마이징거를 설득해 유대인들은 게토에 수용됐다.
그러면 왜? 이 유대인들은 머나먼 아시아 중국의 상하이 홍콩을 망명지로 택했을까? 그 당시 상하이의 지배자(支配者)가 사실상 중국인이 아닌 유대인 서순과 커두리였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에 거점을 둔 두 유대인 억만장자 서순과 커두리는 정치 기반까지 휘어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부터 공산당이 집권하는 1949년까지의 기간에도 상하이는 소위 국제 ‘조계지(租界地)’로서 외국인 거주지로 인정한 것이다. 이 조계(租界) 시기를 중국 공산당은 ‘치욕의 100년’이라 여기지만, 상하이는 그 기간에 중국의 여타 도시와 다르게 근대화(近代化)의 상징인 국제무역도시로 거듭나면서 중국발전에 기여했다.
상하이는 오늘도 여전히 세련된 건물을 지어가면서 상하이를 ‘중국의 뉴욕’이자 ‘로스앤젤레스’로 가꾸어나가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의 발전사(發展史)를 탐구할 수 있는 항만도시이다. 중국의 근대적인 변화·발전은 바로 상하이 항만 발전이 그 시작이었음을 바로 이해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주요 동남아 항구도시에는 ‘샤흐반다르(shah+bandar=왕+항구)’라고 하는 항만관리소장(Port Master)이 있었다. 그들은 시장(市長) 다음으로 높은 위치로서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소위 해결사들이었다. 샤흐반다르는 무역을 끌어들이고 관리하고 선전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인들이었다.
이런 샤흐반다르가 운영하는 항구에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었다. 대외(對外) 지향성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소위 다문화(多文化)를 적극적으로 응용하는 의지다.
현대사에 세계의 중심 국가로 번영했던 나라는 예외 없이 항만을 통해 국부(國富)를 개척해 나갔다.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이 그러했다. 미국도 대서양 쪽의 뉴욕항, 태평양 쪽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항을 개발하고 외국과 무역을 개발 거래하면서 세계 최대 강부국(强富國)의 길을 갔다.
즉 무역 선박들의 항만 입출입 활동을 부추겨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부(國富)를 축적해 나갔던 것이다. 항구와 해운은 곧 그 나라의 미래였던 것이다.
역사를 회상할수록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신라 장보고, 고려 건국의 왕건 이외에는 해양진출과 항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우리 한국은 다행이도 이승만 대통령이 해양진출을, 박정희 대통령이 무역증진정책을 추진하면서 항만(港灣)을 확충하고 지속적으로 항만과 무역관계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일깨워 주었기에 오늘날 무역국가로서 세계에 우뚝섰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