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일제강점기 1909년 방어진 중앙에 세워졌던 사누끼 여관(찬기옥)의 모습. 13일 방어진 역사관 김점식 마을해설사와 방문한 사누끼 여관은 그 당시 형태는 그대로 보존된 채 외관만 목조에서 콘크리트로 바뀐 채 한 식당이 들어서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하야시카네상점의 사장이었던 나카베 이쿠지로(1866~1946). 이수화 기자
(왼쪽부터) 일제강점기 1909년 방어진 중앙에 세워졌던 사누끼 여관(찬기옥)의 모습. 13일 방어진 역사관 김점식 마을해설사와 방문한 사누끼 여관은 그 당시 형태는 그대로 보존된 채 외관만 목조에서 콘크리트로 바뀐 채 한 식당이 들어서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하야시카네상점의 사장이었던 나카베 이쿠지로(1866~1946). 이수화 기자

"일본에 가면 누구나 접하는 일본 1위 통조림 회사의 뿌리가 울산 방어진이라는 걸 아시나요?"

광복절을 앞둔 13일 울산 동구 방어진항 인근에서 한 마을해설사가 조용히 되물은 말이다. 이어 그가 들려준 '그날'의 이야기는 무려 100년이 돼가도 여전히 동구 방어진 곳곳에 묻어 있었다.

# 1915년 식민지 어업기지였던 방어진, 그날의 악몽
울산 동구 방어진은 1800년대 후반까지 농사와 어업을 겸하는 작은 어촌이었다. 모두 2~30가구 정도로 100여명이 모여 고등어, 청어, 정어리, 멸치 따위를 잡고 살았던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전후 동해 어족자원을 노린 일본은 조선의 어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보고서를 발간하고 일본 오카야마지역 어부를 중심으로 조선 이주 정책을 전개했다.

그때부터 방어진은 일본의 식민지 어업기지로 개발되더니 1915년, 방어진에 아무도 원하지 않는 '황제'가 군림한다.

그의 이름은 나카베 이쿠지로(1866~1946). 당시 임겸상점주식회사(하야시카네상점)를 방어진에 근거지로 삼아 설립한 인물로, 현재 일본 1등 통조림 기업이자 수산업 기업 '마루하니치로'의 뿌리기업을 만든 인물이다.

당시 임겸상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마을해설사가 당시 상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수화 기자
당시 임겸상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마을해설사가 당시 상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수화 기자

임겸상점은 기선건착망 방식으로 두 개의 배에 어망을 달아 싹쓸이 하듯 방어진 인근 모든 물고기를 쓸어갔다. 냉장운반선을 건조해 울산 앞바다에서 수확한 생산품을 일본으로 가져가 1.5~3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고 이 자본은 지금 '마루하니치로'의 부의 원천이 됐다.

특히 몸집을 불려간 임겸상점은 1924년 전후로 정치망어업, 게통조림공장, 방어진철공조선, 정어리정유공장 등을 설립하며 방어진에서 '왕국'을 만들어갔다.

그 밑바닥에는 조선인 어부에 대한 착취가 필수적이었다.

임겸상점은 인건비가 낮은 조선인 어부를 거의 강제로 동원했다. 임금 수준은 대략 선장이 70엔, 조선인 어부가 20~35엔 수준이다. 그마저 안 준 적도 허다했다. 기관사 업무는 일본인이, 나머지 막노동은 조선인이 하는 식이다. 일본인에게 울산의 조선인은 사람이 아닌 노예였고, 폭언과 폭력은 당연했다.

방어진항의 현재 모습. 이수화 기자
방어진항의 현재 모습. 이수화 기자

# 일제침탈과 항거역사 공존..."그날의 방어진, 잊어선 안돼"
지금도 방어진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잔재인 적산가옥이 빼곡하다.

방어진항 뒤편 지금의 방어진조선소 주위 공터를 둘러봤다. 바로 '임겸상점'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다.

1920년 일제강점기 어선의 동력화가 이뤄지자, 잡역부로 고용되는 조선인들 역시 확연하게 늘었다. 그때 배에 타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엔 임겸상점의 게깡통공장 노동자들도 동맹으로 포함됐다.

참다 못해 1927년에는 손학익, 유명술 등이 방어진 거리에서 '항일격문'을 살포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구금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참다 못한 울산의 노동자들은 1935년의 노동절(5월 1일)을 맞아 방어진 주재소 앞에서 '제국주의 타도'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붙이고 투쟁에 나서는 사건도 벌였다. 일명 '방어진 메이데이적색비사 사건'이다. 여기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소년과 청년들이 연달아 10명 넘게 검거됐고, 잡혀간 그들의 행방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탄압이 계속되자 일제 경찰은 방어진 인근 일산진의 보성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연달아 가택 수사와 체포를 진행했다.

결국 1930년 말 2차 세계대전 발발을 준비하던 일본이 '울산 독립운동을 뿌리뽑겠다' 시작한 곳은 '방어진'이 됐다.

이날 역사를 함께 되짚어준 김점식·김인우 방어진역사관 마을해설사는 "이 역사는 방어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곳곳에 남아 있다"며 "일본 대기업으로 자리잡은 '마루하니치로'의 이면엔 방어진에 살던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
김귀임 기자 kiu2665@iu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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