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빛이 짙다. 깊어가는 가을 오후, 구도심을 걸었다. 시계탑 사거리를 건너 옛 울산초등학교로 오르는 길에서 故서상연 시인의 ‘그리운 울산’을 만났다. <‘지금의 울산교에서 태화강까지는/태화상회 학생사 조양백화점 전광사/정신당시계점 학성여관/대동병원과 상업은행/제재소와 성냥공장도 있었지...(이하 생략)’> 시인이 남긴 옛날의 울산을 그리며 고개를 들면 조양백화점도 대동병원도, 성냥공장도 볼 수가 없다. 그저 저 멀리 헐어낸 울산초등학교 옛터에 가을앓이를 온몸으로 하고 있는 회화나무가 쓸쓸하다.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을 울산의 중심에서 한땀씩 자라올라 저만치 우뚝하니 참 애잔하다. 100년을 넘긴 학교가 즐비한 울산이지만 교정의 상징으로 자리한 나무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울산과 남목, 언양, 병영의 교정을 지키던 느티나무들은 모진 세월, 태풍에 꺾여 모두 일찍 고사했다.
옛 학성여관 자리는 세월의 흔적에 모습을 달리했지만 여전히 100년전의 흔적이 남은 몇 안되는 건물이다. 그 건물 아래서 슬쩍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읍성길’이 반긴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찾아간 울산의 원형, 읍성이다. 읍성(邑城)은 군(郡)이나 현(縣)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성곽이다. 신라 때부터 해안 방어선이자 국제무역항으로서 위상이 높았던 울산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과 수군절도사영을 모두 갖춘 관방의 중심이었다.
울산읍성의 출발은 바다 건너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고려 우왕 11년인 1385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문화의 지시에 따라 지주사 김급의 주도로 성곽을 완성했다. 조선조에 이르러 성종 7년(1476년)에는 병조판서 이극배의 전언으로 허물어진 성곽이 다시 정비됐고 성종 8년(1477년) 10월에 완성된 기록이 있다.
조선조 때 기록을 살피면 그 당시 울산읍성은 지금의 함월산 남쪽, 중구의 북정동, 교동, 성남동, 옥교동에 걸쳐 있는 도심성곽으로는 상당한 규모였다. 성곽의 높이가 15척(약 4.5m), 둘레는 3,639척(약 1,103m)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성곽의 역사는 조일전쟁 때 재앙을 맞았다. 1597년 왜가 다시 한반도를 도륙한 정유재란 당시 가토기요마사의 주력군에 훼철되면서 흔적을 잃었다. 그때 울산읍성의 성곽 돌은 거의 대부분 가토가 급조한 도산성(왜성) 성벽공사용 자재로 둔갑했다.
오늘 걷는 이 읍성길은 옛길 복원 사업을 통해 읍성의 외곽(둘레) 1.7㎞의 도로에 화살표와 표지판으로 흔적을 남긴 결과다. 울산에 과거 읍성이 어떤 규모였는지는 일부 기록에서만 확인됐을뿐 실체가 없었는데 지난 2019년 발굴작업으로 일부가 공개됐다. 발굴된 조사 지역은 70㎡의 작은 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벽 2.7m, 내벽 7.7m의 체성(體城)이 온전하게 확인됐다. 이 유구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조선 전기 성곽 축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됐다.
울산읍성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처럼 뒤로는 울산의 주산인 함월산을 두고, 앞으로는 태화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축성됐다. 읍성의 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부정형(不定形)인데, 이는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성을 쌓았던 조상들의 배려가 담겼다.
울산읍성의 옛 흔적을 찾아보면 놀랍게도 경복궁을 품은 한양도성의 형태를 벤치마킹했다는 생각이 든다. 둘레가 약 1.7㎞였던 울산읍성 안에는 20여개의 관청, 8곳의 우물, 동서남북을 가르는 십자형 도로가 배치돼 있다. 읍성에는 한양처럼 4대문을 만들었는데 동문은 옥교동사무소 인근, 서문은 양사초등학교 인근, 북문은 옛 울산기상대 왼편 일대로 추정된다. 울산읍성의 정문 역할을 했던 남문은 시계탑사거리 쪽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강해루(江海樓)다. 문루의 이름처럼 울산읍성의 정문은 동해바다와 태화강 100리가 만나는 지점으로 포구가 자리해 뱃길을 따라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읍성 안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객사(客舍)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공간이자 지방관이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장소였다. 이 공간은 외국 사신이나 중앙 관리가 울산에 오면 숙소로도 사용돼 ‘지방에 있는 대궐’역할을 했다.
객사가 임금을 상징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면 실질적인 행정 사무가 이뤄지던 심장부는 동헌이었다. 울산은 고려조 때 공화현으로 격하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임진년 왜란 때 의병의 활약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됐다. 바로 지금의 광역시장급 도호부사가 왕명을 받아 행정을 보던 장소다. 동헌 입구는 가학루(駕鶴樓)가, 뒤편에는 오송정(五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지방 양반들이 기거하던 향사당(鄕士堂), 교육을 담당하던 양사재(養士齋), 군사업무를 맡았던 군관청(軍官廳), 치안을 맡았던 토포청(討捕廳) 등이 읍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도 가학루와 오송정은 새로 지어 옛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동헌에 들어서면 뒤편에 수많은 선정비가 보인다. 울산에서 도호부사를 지낸 인물은 수백에 이른다. 선정비가 바로 그 수령들의 흔적이다. 선정비는 좋은 정치를 편 수령에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마음의 선물을 주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상징이다. 이 가운데 으뜸은 조재선 부사(1713~1774년)다. 그는 1764년 부임해 울산 부사 최초로 6년 임기를 채웠다. 조재선이 울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선정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북구 달골마을, 학성공원 북쪽 산록, 울주군 웅촌 운흥사지 입구까지 3개나 된다. 백성들은 왜 그의 선정비를 여럿 남겼을까. 조 부사는 울산부사시절 수천 냥의 돈을 마련해 백성들의 노역을 대신했고, 자신의 월급과 말을 팔아 4,000금(지금의 수억 원 또는 수십억)을 마련해 백성의 물자로 만들었다.
그의 선정비 비문은 ‘지극히 청렴하고 덕이 많은 지도자로 은혜를 베푼 분이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13자가 새겨져 있다. 공치사와 수식으로 비문을 가득채운 자발적 선정비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기록이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