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이인균 민화작가·본지 독자권익위원·전 울산시청자미디어센터장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민화의 다채로운 화목(畵目)을 따라가며, 화면 속에 깃든 상징과 의미들을 살펴봤다. 이제 시선을 조금 넓혀보려 한다. 개별 작품의 미학을 넘어, ‘민화’라는 장르 자체가 맞닥뜨렸던 역사적 파동과 그 궤적에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화단을 뒤흔든 이 한편의 그림.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며 작은 배들을 삼킬 듯 덮쳐오는 장면.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치는 그림은 우키요에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격정적인 파도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일본 미술이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 건너간 우키요에는 모네와 드가,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충격을 줬고, ‘자포니즘’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흐름을 낳았다. 일본의 전통 그림이 세계 미술사에 영향을 미친 드문 사례였다.

 여기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런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토록 독창적인 민화가 있는데, 왜 민화는 우키요에처럼 일찍이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을까." 무엇이 두 화풍의 운명을 갈라놓았을까. 그 해답은 그림 자체의 미학적 우열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 구조와 사회적 토양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우선 매체의 속성에서 비롯된 유통 방식의 차이를 꼽을 수 있다. 우키요에는 목판 인쇄를 기반으로 한 대량 생산 매체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된 이미지는 일본을 찾은 서양 상인들의 손을 타고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반면 우리 민화는 특정 개인의 주문이나 가정의 장식을 위해 정성껏 그려진 ‘유일무이한’ 예술이었다. 혼례나 돌잔치 같은 구체적인 삶의 의례 속에서 향유됐기에, 대량 유통을 전제로 한 산업적 구조와는 태생적으로 결이 달랐다.

 역사적 조류 또한 냉혹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개항과 맞물려 서구에 유입됐고, 심지어 도자기 포장지로 쓰이던 판화가 서구인의 심미안에 포착되는 극적인 ‘재발견’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같은 시기 조선은 안팎의 시련과 식민 지배, 이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관통해야 했다. 우리 고유의 미감을 외부 세계에 알릴 최소한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고난의 계절이었다.

 여기에 ‘작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더해진다. 우키요에는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처럼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 거장들이 존재했으며, 이는 국제 미술 시장에서 강력한 평가 준거가 됐다. 반면 민화는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공동체의 미감과 소망을 투영한 ‘익명의 예술’이었다. 이 익명성은 민화의 본질적인 숭고함이자 매력이지만, 작가 중심의 서구 근대 미술 문법에서는 그 가치를 온전히 조명받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우키요에가 일찍이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대접받은 것과 달리 민화는 오랫동안 ‘민속화’나 ‘장식화’의 범주에 묶여 학술적 변두리에 머물러야 했던 인식의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흐름은 사뭇 고무적이다. 민화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 파격적인 구도, 그리고 오방색의 강렬한 채색은 현대 미술 및 디자인 언어와 긴밀하게 공명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해외 유수의 전시마다 관람객의 찬사가 이어지고, 민화의 필치를 직접 체득하려는 외국인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우키요에가 19세기에 세계를 향해 돛을 올렸다면, 민화는 이제 비로소 21세기를 자신의 시간으로 맞이하고 있다. 민화가 세계화되지 못했던 까닭은 작품의 완성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유통의 경로와 역사의 시계가 잠시 어긋났기 때문일 뿐이다. 그 엇박자의 조건이 해소된 지금, 한국인의 안방을 묵묵히 지키던 민화가 세계인의 일상적 공간으로 스며드는 풍경은 더 이상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인균 민화작가·본지 독자권익위원·전 울산시청자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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