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백향과를 만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열대 지방에서나 자라는 줄 알았던 백향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채 여름 햇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트 진열대가 아닌 농장에서 말이다. 올해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에 선정된 초록별농장을 찾았다가 뜻밖의 풍경과 마주했다.
"백향과를 아세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패션프루트 말하는 거죠?"라고 답한다. 맞다. 우리가 흔히 패션프루트라고 부르는 과일의 우리말 이름이 바로 백향과다. 이름 그대로 백 가지 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도 향긋한 과일 향이 코끝에 맴도는 듯하다.
엔지니어 출신 부부가 운영하는 이 치유농장에는 백향과 뿐만 아니라 100여종이 넘는 농작물과 허브가 자라고 있다. 농장을 걷다 보면 마치 작은 식물원을 거니는 기분이 든다. 허브 향이 바람을 타고 흐르고, 이름도 낯선 식물들이 저마다의 빛깔을 뽐낸다. 그런데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백향과였다. 탐스럽게 매달린 열매를 보는 순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동남아나 중국 여행지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던 과일이 울산 하늘 아래 익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날 또 하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시계꽃’이라고 부르는 꽃이 바로 백향과 꽃이라는 점이다. 꽃잎의 모양이 시계판을 닮아 시계꽃이라 불리는데, 그 독특하고 아름다운 꽃이 지고 나면 백향과 열매가 열린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영어 이름인 패션프루트(Passion Fruit)의 ‘패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하는 ‘Passion of Christ’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6세기 남미를 찾은 스페인 선교사들은 시계꽃의 독특한 구조에서 십자가와 가시면류관을 떠올렸다고 한다. 꽃 중앙을 둘러싼 실 모양은 가시면류관을, 세 갈래 암술은 십자가에 박힌 세 개의 못을, 다섯 개의 수술은 예수의 상처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시계꽃은 단순한 꽃을 넘어 신앙의 상징이 됐고, 그 열매는 패션프루트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아, 이 꽃이 그 열매였구나."
오랫동안 따로 알고 있던 지식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꽃 하나에도 이렇게 긴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다니 자연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생각해보면 백향과는 내게도 특별한 과일이다. 중국 상하이에 살던 시절 처음 맛본 열대과일 중 하나가 바로 백향과였다. 반으로 자른 껍질 안에는 노란 과육과 까만 씨앗이 개구리알처럼 가득 들어 있었다. 숟가락으로 한입 떠먹는 순간 퍼지던 새콤달콤한 향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생과일은 국내 반입이 어려워 과육만 따로 담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한 번 맛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과일이었다.
그런 백향과를 이제 울산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세상이다. 예전에는 열대과일을 맛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야 했다면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농장을 찾으면 된다. 지구온난화라는 불편한 현실이 한편에서는 우리 식탁의 풍경도 바꾸고 있는 셈이다. 바나나와 망고, 레몬에 이어 백향과까지. 어느새 우리나라 농업의 지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뷔페에서 몇 조각 맛보던 냉동 열대과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무에서 갓 딴 백향과는 향부터 다르다고 한다. 아직 수확철 전이지만 벌써부터 그 맛이 궁금하다.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런데 이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백향과만이 아니었다.
"스테비아를 한번 드셔보세요."
농장 주인의 권유에 허브밭에서 잎 한 장을 따 입에 넣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스테비아는 최근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로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는 허브 식물이다. 그런데 이 작은 잎 한 장이 만들어내는 단맛은 실로 놀랍다. 설탕을 한 움큼 털어 넣은 듯 강렬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다.
"이게 정말 자연의 맛이라고?"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설탕과 인공 감미료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인지 자연이 만들어낸 순수한 단맛은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스테비아 한 잎은 자연이 가진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농장을 천천히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치유란 꼭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허브 향이 스치는 길을 걷고, 흙을 만지고, 나무에 열린 열매를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스마트폰 대신 새소리를 듣고, 에어컨 바람 대신 자연 바람을 맞는 것. 어쩌면 그런 시간이야말로 지친 몸과 마음을 가장 자연스럽게 회복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울산에는 이런 돌봄농장과 치유농장 3곳이 운영되고 있다. 장애인과 어르신, 아이들뿐 아니라 바쁜 일상에 지친 시민들에게도 열린 공간이다. 농업이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을 넘어 사람을 돌보고 마음을 보듬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백향과와 스테비아를 만나며 다시 한번 느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자연은 생각보다 놀랍다. 열대과일이 울산에서 자라고 설탕보다 단 허브가 자라는 시대다. 지구촌의 계절이 하나가 된 듯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만난다.
올여름 나는 이열치열의 마음으로 다시 이 농장을 찾을 생각이다. 새콤달콤한 향을 품은 백향과 열매를 따고, 스테비아의 달콤함에 놀라며, 허브 향 가득한 길을 걸어보고 싶다. 어쩌면 올여름 내가 찾고 싶은 곳은 휴양지가 아니라 치유농장인지도 모르겠다. 백향과의 향기와 스테비아의 달콤함이 기다리는 그곳에서 잊고 지냈던 자연의 시간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래서 올여름이 더욱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