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추석 연휴에 극장가가 달아올랐다. 올 초 ‘왕과 사는 남자’로 시작해 ‘오디세이아’로 이어진 영화붐이 이번 추석에는 외화와 한국영화까지 흥행전에 뛰어들면서 관객몰이 중이다. 몇해전 일본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암살 사건을 영화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영화에서 아베를 암살한 범인을 한국인으로 설정한 부분이었다. 황당한 상상이다. 결국 제작은 무산됐지만 파장은 여전히 남은 상황이다.

 영화는 허구의 세계다. 감독은 상상할 자유가 있고 관객은 그것을 즐길 자유가 있다. 그러나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그대로 불러와 놓고 결정적인 대목만 허구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베를 죽인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캐릭터 하나를 추가하는 일이 아니다. 실제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이번 추석 연휴에 개봉한 ‘암살자(들)’이라는 영화가 딱 그 수준이다. 이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벌어진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와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그해 12월 사형이 확정돼 집행됐다. 다만 배후 문제에서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론이 달랐다. 한국은 조총련과 북한 배후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독범행으로 판단했다.

 영화는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문세광을 모델로 한 문태광을 등장시키고 형사 철구, 사회부장 재환, 신입기자 영일이라는 가상 인물들이 사건의 이면을 추적한다. 영화는 육 여사를 관통한 탄환이 문태광의 것이 아닐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청와대 자작극설’까지 상상력을 확장했다. 허진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거나 결론 내릴 수 없다며 당시 자료와 사실에 남은 의문에서 출발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감독의 설명은 또다른 의도를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들은 재미를 위해 설정한 허구의 인물이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기자 캐릭터가 없었다고 한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사건을 추적하고, 후반부에는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까지 끌어왔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는 실제 역사를 교묘하게 문세광 사건과 연결시켰다. 물론 당시 언론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아일보 사태는 광고중단 사건이었고 8·15 저격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다 발생한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였던 사건 A와 실제였던 사건 B를 붙였다고 그 사이의 연결고리 C까지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의 설정은 지나간 정치사건을 영화화 하는 부분에서 특히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영화에는 실제 인물, 실제 날짜, 실제 건물, 당시 신문과 방송 화면이 등장한다. 그 틈에 감독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과 대사를 집어넣는다. 관객은 두 가지의 연결고리를 함께 보면서 어느 것이 기록이고 어느 것이 각본인지 헷갈리게 된다. 영화의 연출이 사실적일수록 그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감독이 이 부분을 노렸다면 심각한 왜곡이고 범죄다.

 몇 해 전 ‘서울의 봄’이 흥행했을 때 필자는 같은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영화는 12·12라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지만 인물과 상황에 상당한 영화적 상상력을 넣었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10·26이라는 실제 사건을 영화적 서사로 재구성했다. 이 모든 영화의 제작사가 하이브미디어코프라는 점도 흥미롭다. 이쯤되면 한국영화가 대한민국 좌파 세력의 정치하청업으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헛소리는 아닐듯 싶다.

 영화 암살자(들)의 문제는 영화가 허구를 사용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영화에서 허구를 빼면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허구가 실제 역사와 결합하면서 관객의 기억 속에서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신분을 바꿔버리는 데 있다. 미디어 이론에서는 이를 ‘오버코딩(overcod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극적 효과를 위해 특정 인물과 사건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상징과 감정을 덧입히면 관객은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해석의 길을 따라가기 쉬워진다. 필자가 이전 정치영화 칼럼에서 문제 삼았던 것도 이것이었다. 영화적 상상력이 실제 사실을 압도하기 시작하면 역사는 기록이 아니라 연출이 된다. 관객은 역사책보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물론 ‘암살자(들)’의 소재를 금지할 이유는 없다. 문세광 사건에는 당시부터 여러 의문이 제기됐고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론도 달랐다. 감독에게 그 틈을 상상할 자유가 있다. 관객에게도 공식 기록을 의심하고 질문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았다’와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눈 분명한 경계가 있다. 의문은 증거가 아니다. 가능성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적 개연성은 역사적 진실의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베 암살사건의 진범을 한국인 킬러로 바꾸면 우리는 금방 황당하다고 느낀다. 우리가 실제 사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0년 전 한국 현대사는 어떤가.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영화는 때로 첫 번째 역사책이다. ‘서울의 봄’을 보고 12·12를 처음 접하고, ‘남산의 부장들’을 통해 10·26을 만나며, 이제 ‘암살자(들)’을 통해 문세광 사건을 처음 알게 되는 관객도 분명히 있다. 영화가 재미있을수록 그 기억은 더 강렬하다. 영화가 성공하면 허구 역시 수백만 명의 기억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영화인은 표현할 자유가 있다. 정치권력의 검열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늘 책임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관객몰이를 위해 역사의 빈칸을 자극적인 음모와 허구로 채우기 시작하면 섬뜩한 정치 하청 버러지가 된다. 물론 영화는 역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이 역사를 대신하면 범죄다.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처음 접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또다른 허구의 역사가 남아 그 기억이 세대를 건넌다. 영화는 허구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허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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