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앞둔 7일 울산 중구 병영로 인근 ‘한글거리’ 전경. 이수화 기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앞둔 7일 울산 중구 병영로 인근 ‘한글거리’ 전경. 이수화 기자
울산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고향임을 강조하며 수십년 전부터 ‘한글도시’를 표방해왔으나, 거창한 수식어와 달리 내실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특히 10년 전 최현배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병영 일대를 ‘한글거리’로 이름짓고 거리에 있는 외국어 간판을 한글로 바꿔 달았지만, 사후 관리 미흡으로 그 흔적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병영이 단순히 외솔 선생의 고향이란 이유로 ‘한글’이란 주제만 내세우기 보단 경상좌도 병영성, 3·1 만세운동 진원지 등 병영이 가진 다양한 역사적 가치 속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끌어내 연계·순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한글도시 조성사업 일환으로 울산시와 중구가 세운 ‘아름다운 한글길’ 간판이 무색하게 외국어가 잔뜩 들어간 성인전용게임방이 건물에 들어서 있다.
한글도시 조성사업 일환으로 울산시와 중구가 세운 ‘아름다운 한글길’ 간판이 무색하게 외국어가 잔뜩 들어간 성인전용게임방이 건물에 들어서 있다.
7일 오전 찾은 울산 중구 병영사거리. 사거리 북쪽으로는 울산에서 유일한 ‘한글거리’인 병영로가 있는데, 출입로에는 마땅한 안내판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비스듬히 세워진 건물 옆으로 가야 ‘아름다운 한글길’ 간판이 하나 나와 이곳이 ‘한글거리’임을 눈치껏 파악할 수 있었다.

병영로를 내부로 들어가도 상황은 마찬가지. 가로등 꼭대기마다 ‘한글거리’라 적힌 표지판이 있었지만, 크기가 작고 너무 높이 설치돼 있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 가게에는 한글마을임을 강조하듯 영어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적은 간판도 있었지만, 외국어를 그대로 쓴 간판도 만만찮게 많았다. 출입로에서 봤던 ‘아름다운 한글길’이라 적힌 간판이 이곳에도 있었지만, 그 간판 위로 ‘OOPC’라는 성인게임방이 있어 의미를 퇴색케 했다.

앞서 울산시와 중구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고향인 병영을 한글문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15년 한글마을을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병영로 일대 외국어 간판 190여개를 한글 간판으로 교체하고 한글 관련 상징물과 외솔탐방길 등을 조성하는 데 약 14억원을 투입했다.

2015년 한글마을 조성 사업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한글의 울림’ 조형물. 이수화 기자
2015년 한글마을 조성 사업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한글의 울림’ 조형물. 이수화 기자
그러나 10년이 지난 현재 업종이나 업주가 바뀐 점포를 중심으로 외국어 간판이 다시 등장하면서 당초 사업의 효과가 약화되고 있다.

인근 주민 A씨는 “한글거리 사업한다고 한창 간판을 한글로 바꾸던 때가 있긴 했는데, 그때만 그랬지 지금은 딱히 구청에서 신경쓰는 것 같진 않다”며 “요새 경기가 안 좋으니 문닫는 곳도 많고, 한글 간판이 강제된 게 아니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외솔탐방길의 한 벽면에 외솔 선생의 ‘삼일사 노래’ 글귀가 붙어 있는데, 글자가 뜯겨져 자음과 모음이 따로 놀고 있다.
외솔탐방길의 한 벽면에 외솔 선생의 ‘삼일사 노래’ 글귀가 붙어 있는데, 글자가 뜯겨져 자음과 모음이 따로 놀고 있다.
같은 사업을 통해 외솔기념관 주변에 마련된 외솔탐방길도 마찬가지. 외솔기념관 일대 거리 약 800m를 한글로 된 솟대 등 조형물과 담을 활용한 갤러리와 외솔 선생의 글귀가 적인 보행로를 조성했는데, 안내문이 적고 부실해 길을 찾기 어려운 데다 거주민들의 차량에 사진과 글귀 등이 가려진 경우 태반이었다. 일부는 글귀가 아예 뜯겨져 자음과 모음만 처량히 붙어 있기도 했다.

‘한글도시’란 명맥을 잇기 위해선 체계적인 사후 관리와 지원이 이어져야 하지만, 정작 행정당국은 외솔기념관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행정력을 투입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울산시가 2015년 ‘한글문화 중심도시’를, 2021년에는 중구가 전담부서를 두고 ‘한글도시’를 선포하며 한글역사문화 특구 지정에 도전하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2023년 특구 지정이 무산된 이후 한글 관련 사업 방향은 정체된 채 외솔 선생 기념 사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글날을 전후해 외솔한글한마당 등 관련 행사는 이어지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병영 공간을 변화시키는 사업으로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5일 울산 중구 병영오거리 일원에서 열린 ‘제107주년 울산병영 3.1만세운동 추모제 및 재현행사’에서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울산매일 포토뱅크
지난 4월 5일 울산 중구 병영오거리 일원에서 열린 ‘제107주년 울산병영 3.1만세운동 추모제 및 재현행사’에서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울산매일 포토뱅크
복원된 경상좌도 병영성 서문지 성곽. 울산매일 포토뱅크
복원된 경상좌도 병영성 서문지 성곽. 울산매일 포토뱅크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병영을 ‘한글 하나만을 보여주는 거리’로 접근하기보다 병영이 가진 더 큰 역사적 이야기를 공간 전체에 담아야 한다고 제언한다.

실제 병영은 하나의 테마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역사자원을 품고 있다. 조선시대 경상좌도병영성이 자리했던 군사도시의 역사, 울산병영3·1만세운동의 흔적,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삶이 한 지역 안에 겹쳐 있다. 여기에 전통시장과 오래된 골목, 생활문화가 더해져 있어 역사와 인물, 일상 공간을 연결한 복합적인 테마거리로 발전시킬 여지가 크다.

최정우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대구 김광석 거리, 제주도 이중섭 거리 등 다양한 테마길이 있지만 한 가지 주제만 강조하는 길은 사람들이 금방 질려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끌기 어렵다”며 “‘병영’이라는 큰 테마 속에 최현배와 한글을 녹여내고 여러 콘텐츠가 순환형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이어 “각각의 장소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구성해야 방문객에게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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