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이 박상진 의사의 8대조 때부터 터를 잡고 살던 세거지(世居地)라면, 경주는 박상진 의사 처가인 경주 최씨들이 대대로 가문을 지켜온 고장이다.
박상진의 처가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南川) 옆에 터를 잡은 탓에 월성 최씨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경주시 교동 69번지 최부잣집 고택이 바로 박상진의 처가로, 이곳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으며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했다.
■ 경주 최부잣집 규수 영백 =1898년 경주 최씨 문중은 최현교의 장녀 영백을 당대의 명문대가이자 만석지기 살림의 밀양 박씨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열 여섯의 소녀는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신랑과 혼례를 올렸고 3년만인 19이년 외아들 경중을 해산했다.
하지만 '여자 팔자 뒤움박 팔자'라고 했던가. 99칸짜리 고택에서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던 진사댁 규수 최영백은 41세에 청상과부가 됐고 남편의 순국 이후에는 끼니를 잇기 위해 채소 행상을 다녀야 할 만큼 모진 세월을 감내하게 된다. 시아버지인 박시규가 아들의 제문(祭文)에서 표현했듯 실로 '비참한 신세', 저주할 세월', '죽은 자의 것보다도 못한 삶'이었다.
최영백은 남편의 순국 후 죽기를 각오하고 먹지도 씻지도 않다가 마침 태어난 손자(박위동)를 안고서야 음식을 입에 댔다. 당시 최영백의 식솔들은 박상진이 일경에 체포된 지 1년 뒤인 1919년, 최영백의 친정(교동)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교남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는데, 친정아버지 최현교는 곡기를 끊은 딸을 부여잡고 "네가 이대로 죽으면 네 자식들을 돌보지 않겠다. 그래도 좋으냐"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최영백은 손자 위동이 집안을 일으켜줄 것이라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걸었지만, 생계를 위해 떠난 타향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가문의 부흥을 보지 못한 채 83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 조반석죽도 감사해야할 모진 기난=박상진의 아들 경중은 물론 손자 위동마저 사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진 '사상범' 박상진의 일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 통에 취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가난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으로 국내·외를 휘돌았던 박상진은 처(최영백)의 사촌동생이자 동지였던 최준에게 집안의 재산관리를 대신 맡겼는데, 훗날 이 일이 잘못돼 재산분쟁으로까지 비화됐고 이 과정에서 가산을 모두 잃게된 것이 가난의 시발점이었다.
박상진의 증손자인 박중훈씨에 따르면 당시 박상 진家의 재산은 논밭 7,000여 두락(마지기)에 임야 100만평 등 만석지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박상진이 가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조달하면서 논밭 900여 두락만 남게 됐고 이 마저도 재산분쟁으로 잃게 된 것이다. 이후 만석지기 집안은 졸지에 남의 땅을 빌어 먹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급기야 논 다섯 마지기와 문중 밭 너댓 마지기를 빌려 기른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면서 가까스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논의 경우 660㎡, 밭은 990㎡이 한 두락에 해당하니 당시 몰락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박상진 의사의 손주며느리(이갑석·85)는 시집 온 지 사흘 만에 곡간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당시 시어머니인 고성 이씨부인과 시조모(최영백)는 차마 새색시에게는 이 같은 사실을 내색하지 못한 채 부엌에서 머리를 맞대고 걱정했 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 가난이 앗아간 배움의 기회 =박상진의 집안은 대대로 이퇴계의 학맥을 이어온 전통유림의 가문이었다. 박상진의 조부 용복이 187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일천(逸薦·사회의 덕망이 높은 도학자를 추대해 높은 관직에 임명함으로써 국책에 참여하게 하는 제도)으로 북부도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생부 시규는 1885년 을유문과(乙酉文科) 을과 사인(乙科 四人)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홍문관 시독·승정원 승지·규장각 부제학 등을 두루 거쳤고 양부 시룡 역시 1890년 경인별시문과(庚寅別試文科) 을과 삼인(乙科三人)의 성적으로 급제해 홍문관 교리·봉사 시봉사·등을 역임했다. 박상진 자신도 서울로 유학을 가 법률·경제전문과정인 양정의숙을 졸업한 뒤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 법원에까지 발령받은 인재였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조반석죽(朝飯夕粥)조차 감사히 여겨야했던 고된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조차 빼앗겼다.
박상진 순국 당시 21세의 나이로 보통학교에 다녔던(동아일보 1921년 8월 17일자 기사) 외이들 경중은 사정이 나았다. 집에서 한학(漢學)을 하다 늦게 신학문을 시작해 교남학교(橋南學校)와 수원농림(水原農林)을 졸업했던 것. 그러나 순국 직후 태어난 손자 위동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박상진 일기에 있어 위동의 존재는 몰락한 집안을 중흥시켜줄 존재이자, 당시의 '저주할 세월'을 견디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동을 초등학교까지만 뒷바라지 한 것은 그 가난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위동의 장남(故 대훈)과 차남(정훈·57)도 중학교만 마쳤고 단, 셋째(중훈·54)와 막내(필훈·49)는 독립유공자 자녀에게 지급됐던 장학금으로 각각 상고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 사촌처남 최준과의 재산분쟁=박상진은 늦어도 1914년 8월부터 최준의 영입을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준의 집은 북쪽에서 박상진의 집이 있는 녹동으로 가려면 경유해야 할 읍내에 위치, 평소 연락기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일제조차 만만히 대하지 못한 부와 명성을 겸비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안전했다.
앞서 언급했듯 박상진은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최준에게 전재산의 관리를 맡겼다. 녹동에 살던 그 일족들이 최준이 살던 경주 최씨 집성촌 근처로 이사를 간 것도 최준이 "누님(영백)댁의 재산을 관리하기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하니 근처로 이사와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재판기록도 있다.
그런데 최준과 맺은 인연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박상진의 식솔들을 비참한 생활로 내몰았다. 박상진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2년 대구에 곡물상인 상덕태상회를, 이어 1914년에는 포목 상인 내외물산을 각각 개설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포목상 경영에 실패하자 외상거래를 위해 설정해뒀던 삼정물산의 근저당 3만 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당시 박상진과 최준, 그리고 훗날 상해임시정부 법무차장을 역임한 김용섭(삼정물산 임시 대리인) 변호사는 부채 정리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삼정물신에 저당잡힌 논밭 900여 두락을 우선 삼정물산이 경락받도록 한 다음, 박상진이 연리 6%에 5년 동안 원금에 대한 분할 상환을 마치면 명의를 다시 되찾아오고,그 관리를 최준이 맡도록 했다. 그런데 원금 상환이후 최준이 삼정물산 앞으로 된 논밭 900여 두락의 명의를 박상진이 아닌 자신 앞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재산분쟁이 시작됐다.
당시 최준과의 재산분쟁은 박상진의 생부 시규가 아들의 삼년상을 하루 앞두고 쓴 제문(祭文)에도 기록돼있다. 박시규는 제문에서 "네가 죽은 후 최준은 우리 집안이 가졌던 농토의 전부를 그가 샀다고 핑계를 대면서 히루아침에 다 빼앗아 가버렸다.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너의 장인도 최준에게 꾸짖기를 '우리 집안은 옛날 조상 때부터 정당치 못한 일에 대해서는 한 평의 땅도 한 푼의 돈도 몸에 붙이지 않았었다. 너도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빼앗은 농토를 되돌려주어야 옳을 것이다'라고 했었다. 네가 살았을 때 최준과 더불어 어떻게 했기에 그 욕스러움이 조상에게까지 미치며, 또 나로 하여금 이 궁지에 빠져 하소연해도 아무 반응이 없도록 하였느냐"고 비통해했다.
동가식서가숙하던 일족들은 남아있던 모든 힘을 이 재산을 찾기 위해 소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1930년 최준과의 재산소송에서 패한 박상진 일가는 경주 최씨의 땅인 교남을 떠나 생가가 있는 울산 송정동으로 다시 거처를 옮겨 부산으로 떠나는 1957년까지 생활했다.
■경주 최부잣집의 독립운동=경주 최부잣집의 장손인 최준은 박상진 일족들과 재산분쟁을 사기도 했지만, 그 자신 역시 형제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였다,
최준은 박상진을 비롯해 한말의 우국지사인 최익현, 의병장 신돌석 등과 교류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겨레의 일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그러던 중 최준은 백산 안희제(박상진과 함께 양정의숙을 졸업한 동기생)를 만나게 된다. 안희제는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14년 영남지역 민족자본가들을 규합, 부산에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 상회를 설립했다. 곡물상이었으나, 사실은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소였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루트였다. 당시 백산상회의 사장이 바로 최준이었다. 1919년 백산상회의 대차대조표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댄 정황이 나타나 있다.
경주 최씨의 장님인 최준과 3남인 최완은 199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 단, 차남인 최윤은 형 최준을 대신해 조선총독부가 "○안한 중추원 참의를 받아들였다. 광복 후 최준은 참은 재산과 경주고택, 장서류 8,000권 등의 사재를 털어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이것이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 경주에 남아있는 고색창연한 최부잣집 고택도 영남대 재단 소유다. 최준은 경주 최씨 가문 중 마지막 부자로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6가지의 가훈을 실천한 경주 최씨의 마지막 부자였다.
현재 교동 경주 최씨 집성촌은 동네 입구에 위치한 한정식집 '요석궁'과 안쪽 왼편의 '경주 최부잣집 고택',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오른편의 경주 교동법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배준호·조혜정 기자<울산매일·CBS 노컷뉴스 공동취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