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곤 동명대 교수·방송영상학과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썸 탄다'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썸'이라는 말은 영어 썸씽(something)에서 파생된 말이다. 호감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기 직전의 남녀 사이를 지칭하는 신조어다. ‘썸'이란 신조어의 인기를 반영하듯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썸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tvN의 개그 프로그램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중 하나인 ‘썸 & 쌈'이다. 다정한 연인 사이의 ‘썸'타는 커플과 그 반대의 ‘썸'커플이 등장해 웃음을 자아내는 코너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외에도 방송에서 ‘썸'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고, 모 정당의 최고위원회에서도 ‘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썸'이라는 말은 최근 젊은 세대들의 마음과 행동을 반영해서 나타난 신조어이다. 언어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단한 사회 변화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 어휘가 끊임없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어느 한 낱말이 다른 새로운 뜻을 파생시켰거나 이전에는 없었던 어휘가 새로 나타났을 때 이를 ‘신조어'라고 부른다. 특히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신조어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러한 신조어 사용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작년에 국립국어원은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 등에서 사용된 신조어를 정리해 ‘2012년 신어 기초 자료'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에 실린 신조어들을 보면 먹고살기 힘든 세태를 반영한 말들이 많다. 생애주기별 모든 세대의 고단함이 2012년 신어에 등장한다. ‘손주병'은 맞벌이 자녀 대신 조부모가 손주들을 돌보며 생기는 정신적, 육체적 문제점을 지칭하고, ‘펭귄부부'는 펭귄의 희생정신에 빗대 가족의 생활방식을 모두 어린 자녀에 맞추는 부부를 의미한다. 직장내 따돌림을 뜻하는 ‘직따'와 월급만 축내는 게으른 직장인을 이르는 ‘월급 루팡'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보고서에는 젊은 세대의 힘든 현실을 반영한 신어가 유난히 많다. 경제상황이 나빠 연애, 결혼, 출산 3가지를 포기하는 세태를 반영한 ‘삼포시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도 독립하지 않은 채 부모와 함께 사는 자녀를 뜻하는 ‘신캥거루족', 취업 후에도 찰거머리처럼 부모에게 붙어 기대어 사는 ‘찰러리맨' 등이 있다.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로 ‘웃프다'라는 것도 있다. ‘웃프다'는 ‘웃기는데 슬프다'는 의미의 신조어로 눈앞의 현실은 웃기지만, 그래서 당장은 피식 웃게 되지만, 속사정을 생각하면 슬퍼지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아무리 노력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혹독한 현실을 자조적인 웃음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젊은 세대가 썸 타는 사이에서 머무르고 더 이상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최근에 인기를 모았던 텔레비전 드라마 ‘상속자들'이나 ‘별에서 온 그대'의 재벌2세, 외계인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로맨스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재벌은커녕 연봉 3,000만원 받는 회사원 되기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것이 지금 젊은 세대가 처해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모태솔로'를 외치거나 가벼운 ‘썸 타기' 정도로만 로맨스를 이어가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썸'이란 말은 지금 젊은 세대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젊은 세대의 불안은 실패에 대한 불안인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부모 세대들이 망하는 걸 체험했고, 21세기의 금융위기로 국가 전체가 장기적인 불황에 빠지는 걸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젊은 세대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남아있고, 이것이 연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애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곧 ‘썸'이란 말을 탄생시켰을 것으로 본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자존감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는 현실을 경험한 젊은 세대들이 오롯이 남녀 간의 감정만이 존재하는 ‘썸 타는 관계'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썸 타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젊은이들의 나약함을 탓하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젊은 세대의 과감한 도전정신도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정치권을 비롯한 기성세대들이 희망이 사라진 사회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있을 지방선거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노력들이 많이 표출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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