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m 돌기둥 위에 우뚝 선 넬슨 제독.

좁은 바다,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프랑스는 오랫동안 전쟁과 동맹을 반복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공화정이 수립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아네트가 처형 당한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럽 여러나라는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된다. 이때 프랑스에서 등장한 인물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이다. 전쟁으로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의 자리에 오른 후 1804년에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다. 그때까지 나폴에옹이 차지하지 못한 나라는 영국 뿐이었다.

나폴레옹이 차지못한 영국

하지만 당시 영국 해군에는 뛰어난 지도자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제독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넬슨은 1971년 13세때 외삼촌이 선장으로 있는 배의 선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배를 옮겨 타면서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고 북극해를 통해 인도항로 개척단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동인도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출항한 인도항해에서는 처음 전투를 경험한다.
1778년 12월 20세때 그는 함선 배저호의 최연소 함장으로 임명된다. 1793년 2월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하자 참전한 다음 1794년 코르시카 전투에서 영국군은 승리를 했으나 적의 포격 파편에 얼굴을 맞아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한다. 1796년 지중해 함대의 소함대 사령관이 된 후 독자적으로 프랑스 해안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 1797년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넬슨은 기사 서훈을 받고 해군 소장으로 승진한다.

팔 잃고 돌아서 전쟁지휘

1797년 5월 스페인과 교전중 상륙 보트에서 내리다가 오른쪽 팔에 적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한다. 함선으로 돌아온 그는 “나에게는 아직 온전한 다리와 왼팔이 있다”면서 부하의 부축을 뿌리쳤다고 한다. 결국 오른팔을 잘라내는 수술을 한 후 붕대를 감은 채로 30분 만에 다시 지휘석에 앉았다고 한다. 그해 9월 영국으로 돌아온 그를 국민들은 ‘영웅의 귀환’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1789년 당시 이집트까지 정복한 나폴레옹은 멀리 인도까지 진출할 야심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나일강에서 프랑스 함대를 대패시킨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도망치듯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넬슨이 나폴레옹의 야심을 무참히 좌절 시켰기 때문에 이 전투는 7년 후에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세계사적으로 더 의미가 있는 승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관광객으로 항상 붐비는 트라팔가 광장. 사방의 검은 사자상이 위용을 더하고 있다.

오른쪽 눈과 팔을 잃은 넬슨이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1805년 10월 21일 새벽 영국과 프랑스 두나라 해군의 최후 결전이 벌어졌다. 스페인 남서쪽의 트라팔가르 앞바다에 정박한 넬슨의 함대에는 ‘영국은 그대의 임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는 깃발이 펄럭였다. 트라팔가르는 프랑스·스패인 연합군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이동하는 바닷길목이었다. 넬슨은 외눈을 치켜뜨고 적군을 기다렸다.
27척의 함선으로 33척의 적군을 맞이해야 하는 넬슨은 함대를 자신이 이끄는 15척과 부사령관 콜링우드가 이끄는 12척으로 나누었다. 당시 해전은 함선들이 서로 포를 쏘고 대열을 다시 맞추는 식이었다. 둘로 나뉜 넬슨 함대는 함선 양측에서 포를 쏘아 적 함대의 대열을 흐트려 버렸다. 그리고 뱃머리를 잽싸게 돌려 포격을 계속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적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판 위가 온통 피로 물들 무렵, 넬슨은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놈들이 드디어 나를 잡는데 성공했군, 총알이 내 등뼈를 부수고 지나갔어.” 하지만 그는 고통을 이기고 마지막까지 함대를 지휘했다. 넬슨은 완벽한 승전소식을 듣고 나서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임무를 완수 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함선 5척을 침몰시키고, 17척을 사로잡아 세계 해전사에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나선 원정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 로타리 중심의 트라팔가 광장에 우뚝선 넬슨 기념 돌기둥 꼭대기에 동상이 있다.

넬슨은 죽었다. 프랑스 혁명의 향방도, 1800년대를 구가하게된 대영제국의 운명도 사실상 이때 결정됐다. 넬슨이 내건 명령의 핵심은 ‘의무’였다. 주어진 의무를 다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넬슨의 죽음과 관련해 술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냉장보관시설이 없었기에 긴 항해 동안 넬슨 유해의 부패를 막기위해 럼(Rum)주를 관속에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해 보니 관속에 가득채운 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항해 중 수병들이 관에 작은 구멍을 내 술을 빼 마셨다는 것이다. 넬슨을 존경했던 부하들이 그의 혼이 담긴 술을 마시고 싶어서 였다. 그들은 관속의 럼주를 ‘넬슨의 피’(Nalson’s blood)라고 불렀다. 이후 영국 해군 장병들에게 배급되는 럼주는 ‘넬슨의 피’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같은 영국 해군의 럼주 전통은 1970년 7월 31일까지 무려 300년 이상 계속되었다.

럼주(酒)로 가득채운 그의 관

넬슨 제독의 위용은 런던시내 트라팔가(Trafalgar)광장에서 볼 수 있다. 로타리 중앙에 위치한 광장과 하늘높이 치솟은 높이 55m의 돌기둥이 트라팔가 광장의 풍광을 지배한다. 그는 바로 그 돌기둥 위에 우뚝 서있다. 그 아래 부조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을 비롯해 넬슨이 싸워 이긴 유명한 4대 해전이 기록되어 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친 일본해군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동양의 넬슨’으루 불렸다. 도고가 세계해군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도고는 “나의 업적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한국의 이순신 장군에게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충무공 이순신과 넬슨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바탕으로 걸출한 지도력을 보여준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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