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여년전,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세계최강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킨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1904년 2월8일~1905년)에서 승전으로 중국(청)으로부터 동양의 대국(大國) 자리를 넘겨받았다.
당연히 승전파티가 열렸다. 천황도 참석한 축하연이었다. 주인공은 러·일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다. 도고는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서해에서 청나라 ‘고승(高升)함’을 격침시켰는데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것이다. 축사가 이어졌다. 어느 참의원이 "도고 제독은 가히 영국의 넬슨 제독이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입니다"라며 축하했다. 이에 도고 제독이 이렇게 답한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견하고 찬(讚)함은 감당하겠으나 감히 이순신 장군과 비견함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구두끈도 묶을 자격이 안 되는 자입니다… 나와 넬슨(이순신과 같이 영국을 구한 해군 제독임)은 거국적으로 지원을 받아 전투에 임해 승전했으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왕의 지원은커녕 오히려 왕의 의심과 동료 장군의 끝없는 음해와 고문까지 받고 거기에 백의종군(白衣從軍) 처벌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신고(辛苦)의 고난 속에서 23회 대전을 모두 완벽하게 승리전으로 이끈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나 넬슨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전신(戰神)입니다"라고 답사했다. 이 같은 도고 제독의 답사 이후 일본 사회에서 겸양을 말 할 때 "ㅇㅇ사마(씨)의 구두끈도 묶지 못한다"라는 말이 유행됐다.
이후 일본 학자들은 이순신의 전투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조사연구했고 일본 해군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전략을 바늘귀에 실 꿰듯이 연구했다. 지금도 일본 식자층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앙의 념(念)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의 침입은 수없이 많았지만 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서게 한 전쟁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을 거쳐 중국까지 정복하려는 야심찬 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15만여명의 일본 침략군을 격퇴시킨 것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어느 영화 속 대화다. 왜군 포로가 이순신에게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다"라는 이순신의 대답을 듣는다. 그러자 일본 포로는 전투중 이순신은 부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앞장서는데 자신의 리더는 그렇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자기 리더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하를 방패삼는 리더였던 것이다. 그 일본 포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으니 그것으로도 불의와 의의 싸움인데 전장에서 직접 본 조선vs일본 리더들의 모습도 의와 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당시나 오늘 이 시대나 사회 구성원들이 갖는 의문이 있다. ‘참된 지도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다음은 이순신의 아들 이회가 아버지를 의심하는 선조왕에 대해 불만을 표하자 아버지 이순신이 한 말이다. "무릇 장수 된 지도자의 도리는 의리(義理)다. 그 의리는 만백성에 대한 충(忠)이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건재해야 임금이 편안한 법이다"라고 가르친다. 정유재란 때다. 선전관 양호가 두 공문서를 가져왔다. 이순신을 군직에 복직시키겠다는 기복수직교서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이렇게 썼다.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했으니 짐이 무슨 할 말이 있겠나"이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신(臣)에게는 아직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이충무공행록).
그리고 명량해전에 출전해 150여척이 넘는 왜적 함선을 수장시켜 물리쳤다. 그날 밤 그 난중일기에 "천행(天幸)이다"라고 적었다.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음에도 하늘의 행운이 따랐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명량해전은 이순신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엄청난 전투였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이 유명한 말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 기간에 쓴 난중일기에 적힌 말이다. 이순신은 억울하고 치욕적인 백의종군(白衣從軍)처벌까지 받았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억울하고 억울한 선조의 처벌을 뒤로하고 그 자신이 직접 남해안의 해전 예상해역(울돌목)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런 후 원균의 군대가 칠천량 패전때 버려두고 도망쳤던 12척의 배와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끌고 온 1척의 배, 이른바 ‘12척(+1)으로 일본의 330척의 전함을 격파하고자 필승의 전쟁 준비를 했다.
이순신의 이 「12척+1 명량해전」은 오늘의 후배 한국 해군에게 국가 위기 방어는 해양 연구부터 시작해야된다는 유시(遺示)가 돼 주고 있다. 울돌목은 빠른 바닷물이 해안에 부딪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어 명량(鳴梁)으로 불리는 해협이다. 명량대첩의 승전은 바로 이 울돌목의 급류(急流) 특성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산물이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적을 쫓다가 함상에서 다음 말을 남기고 작열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겼다. 그러나 당분간 내죽음은 숨겨라"
이에 신성대 이근배(1940~)교수가 정소파(1912~2013)의 『독임란사유감(讀壬亂史有感)』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해주는 말을 전한다. 「청사(靑史)에 길이 빛낼 자랑일레, 도둑떼 몰고 쫓고 앞바단 핏빛인데, 북울려 무찔러 가는 것! 눈에 선하구나, 여기 옷깃 여미고 흐린 맘 가다듬어 높이 우러를 역사가 있다. 오늘도 저 임진년 왜적들이 대한해협을 넘어와 온 나라를 뒤흔들던 그날을 떠올리게 나라 안팎이 자못 어지럽구나. 백성들이 배부르고 평안함을 북돋아줘야 할 군신(君臣)들이여, 오늘도 광화문 네거리를 지키고 서 계신 충무공 동상앞을 어찌 아무 생각 없이 오고 가시는지!」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