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 때 정부가 발행한 지가증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농지개혁 때 정부가 발행한 지가증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은 가장 먼저 농지개혁(農地改革)을 단행했다. 대지주(大地主)들의 농지를 정부가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해서 구입하고, 이를 소작농(小作農)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판매한 것이다. 이런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이 거의 사라지고 자작농(自作農)이 획기적으로 증가해 소득분배가 개혁됐다. 1940년대 후반, 남한인구 약 70% 농민중 80%가 소작농이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이 대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빌린 대가로 수확물의 거의 50%를 지주에 바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역사 이래 농민은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있기까지 사실상 지주들(양반계급들)의 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사회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농지의 70~80%를 실제 경작(耕作) 농민들에게 분배 조처한 것이다. 이승만의 농지개혁(農地改革)은 이른바 유상(有償)몰수 및 유상분배 개혁이다. 

 이승만은 1950년 3월, 지주(地主)가 평균 수확량의 150%를 보상받기로 하고 농민은 이를 5년간 분할 상환하는 구체적인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남한 농민은 마침내 5,000여년 만에 농지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져오게 한 사유재산(私有財産) 기틀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후 농민들은 양반들의 종으로부터 벗어나 국가 구성원의 일원(국민)이 됐고, 대지주들은 지가증권(地價證券)을 이용해 근대산업에 투자하는 계기를 얻었다. 

 역사를 회상하면 이승만의 이 같은 과감한 농지개혁은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일본식민지 시기까지 무려 5,000여년간 우리 농촌사회를 지배해 온 왕족들과 양반들의 지주계층과 농민 간의 철통같은 신분(身分) 차이에 의한 억압 착취 구조를 해체했고, 때맞춰19세기 전후부터 서양에서 전래된 자유평등사상이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과 융합 분출되면서 이 땅의 뿌리깊은 양반, 상놈 신분차별제를 스스로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매년 양곡  약 478만여석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자, 농민 자녀들도 학교에 진학했다. 1945년 136만명이었던 초등학생 수는 1955년엔 287만명으로 거의 두 배, 중등학생 수는 8.4배, 대학생 수는 10배가량 증가했다. 교육기관에는 농지개혁을 적용하지 않자, 지주들이 사학재단(私學財團)을 만든 덕분이었다. 1943년 39개였던 사립중학교는 1953년 246개로 늘었고, 사립 대학교는 전라북도 정읍의 대지주 김성수가 고려대학을 세우는 것을 필두로 49개나 세워졌다. 농지개혁이 부른 사립교육기관 설립은 정부의 초등학교 의무교육 강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획기적인 인적자산(人的資産) 배출과 축적이 일어났다. 

 이 결과 농민들의 증산(增産)이 더욱 북돋아졌다. 그 여파는 남한 전역에 더욱 시장경제를 향상시켰고, 농업 생산성 향상은 시장경제를 다각적으로 꾀하게 했다. 요컨대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남한의 경제 주체를 양반 중심에서 농업인으로 옮겨지게 하면서 농민들은 각기 능력대로 농업생산의 범위를 생산 위주에서 선별, 포장, 저장, 가공, 출하 판매까지 기업경영식으로 확산시켰다. 그 일련의 확산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6대 시장경제 강국에 이르게 했다. 

 이런 엄청난 발전적인 현상은 지금까지 땅을 소유해보지 못한 농민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산 방법을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농민 스스로의 증산방법의 체계적인 연구활동은 5,000여년동안 계속돼온 미신적인 기우제(祈雨祭)를 사라지게 했다. 

 아! 우남(雩南) 이승만!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을 때는 신(神)에게 농사지을 비를 비는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 우수현(雩守峴)! 이승만의 아호 「雩南」은 기우제를 지내는 곳 「雩守峴」의 「雩」자다. "비가 와야 농민들이 편하게 농사를 지을 텐데…"하는 바램으로 이승만은 「雩」자를 그의 호로 택한 것일까? 그 우수현의 남녘<지금의 남산(南山)자락>에서 자란 소년이 바로 이승만이다. 이 소년이 장성한 훗날, 그의 아호가 「雩南」으로 지어졌고, 그가 바로 독립투사 이승만이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제1차로 5,000여년 동안 농민을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면서도 농민을 사실상 노예(머슴)로 취급했던 지주(地主)소유의 농지제도를 제1차로 개혁해 성공시킨 것이다. 

 이 당시 중국의 장제스(1887년~1975년)도 모택동의 공산주의에 밀려 대만으로 쫓겨 온 후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중국 본토에서 과거 농민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점을 교훈 삼아 장제스도 발 빠르게 개혁에 나선 것이다. 경작지 임대료는 1년치 작물 수확량의 37.5%를 초과하지 못하게 했고,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정책도 펼쳤다. 이를 통해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지주의 이익도 보장하려 했다. 장제스의 농지개혁도 성공해 오늘의 풍요한 대만 경제를 이룩했다. 

 지난 UN 참전 기념식에 참석하려 방한한 콜롬비아 대표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코리아(Korea)의 기적적인 번영의 토대가 된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배우고 싶다고 했다. 콜롬비아 등 세계 빈곤 국가들은 아직도 5억여명의 농민 빈곤층을 품고 있다. 그리해 콜롬비아를 비롯 과테말라, 인도, 방글라데시, 필리핀, 남아공 등은 오늘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리 브리스 교수는 1900년 이래 미국과 세계사에 크게 발전적인 영향을 미친 지도자 40명을 순위별로 거명했다. 루스벨트 대통령부터 순서대로 거명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25번째다. 케네디 대통령은 27번째, 얼마전 100세의 일기로 서거한 공산권과의 화평 외교관 미국 키신저 장관은 33번째, 그 유명한 러시아 「페레스트로이카」 기수 고르바초프는 37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만델라 대통령은 마지막 40번째로 랭크됐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울산포럼 대표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