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5월 인도양을 지나던 한 군함에는 한국의 6·25전쟁에 파병되는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1935년 무솔리니의 이탈이라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왔을 때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차대전 후 결성된 국제연맹에 전 세계가 무솔리니에 집단으로 맞서줄 것을 요청했으나 귀 기울여 주는 나라는 아무 데도 없었으며, 결국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나라 없는 설움을 5년이나 견딘 끝에 1941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국제연맹이 해체되고, 2차대전 후 새로 결성된 국제연합(UN)은 미국의 주도로 즉각 UN 최초의 연합군 파병을 결정했고, 이를 처음부터 적극 지지하고 나선 셀라시에 황제는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에티오피아는 부족 간의 갈등도 여전했고, 변변한 군대조차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국제 기준으로 명백히 빈곤국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황제는 한국으로의 파병을 밀어붙였다. 믿었던 국제연맹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그 결과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경험을 황제는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국가안보엔 국제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8월부터 파병 준비에 나서 우선 자신의 근위병 중에서 최정예 1,200여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한국에 산이 많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 정예병들을 에티오피아의 고지로 보냈고, 이곳에서 무려 8달 동안이나 영국군 교관으로부터 매복, 순찰, 산악전투 훈련을 받게 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다음 마침내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황제 궁전 앞에서 출정식을 했다.
출정식에서 황제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고 명령을 내린 후 ‘강뉴부대’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이라는 뜻이다.
강뉴부대는 3주간의 긴 항해 끝에 1951년 5월 6일 부산에 도착했다. 미국은 이들에게 새로운 군복과 최신식 무기를 지급했으나 자신들이 다루던 구식 무기와는 너무 달라 그 사용법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이러니 이들의 전투력에 의구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미군 전술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고, 언어도 문제였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는 에티오피아군에게 후방의 치안과 보급을 맡기려 했다. 하지만 강뉴부대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미군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겠다는 이들의 고집에 연합군 사령부는 할 수 없이 이들을 전투가 가장 치열한 강원도의 중동부 전선으로 보냈다.
강뉴부대는 8월 12일 철원과 화천 경계의 적근산 일대를 순찰하라는 첫 임무를 맡았다. 도중 중공군과 맞닥뜨렸는데 무려 15대 300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시간을 교전한 끝에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4명이 전사하고, 대다수가 부상한 이 치열한 전투 하나로 에티오피아 병사들을 은근 무시하던 연합군의 의식은 단번에 바꼈다.
이후 강뉴부대는 모든 전투에서 전설을 써 내려갔다. 총 6,037명의 병력이 253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수비든, 공격이든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253전 253승. 국방부가 발간한 한국전쟁사의 전례 없는 공식 기록이다. 이런 탁월한 성과로 강뉴부대는 매년 교체된 3개의 전투부대 모두가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포로는커녕 단 1구의 전사자도 전쟁터에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후 포로 교환식에서 16개 전체 전투부대 파견국에서 유일하게 대상자가 없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였다. 강뉴부대는 포로로 잡힐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각오를 매일 다지면서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자가 생겼을 경우 이를 수습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강뉴부대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귀신이거나 식인종이라는 소문까지 퍼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 전체가 흑인으로 이뤄진 부대는 처음 봤을 것이라 공포심도 더 컸을 것이다.
에티오피아군은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이름의 보육원을 두고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던 시기라 강뉴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식사량을 줄여 고아들과 음식을 나눴다. 그렇게 해도 수십 명의 고아를 먹이는 게 쉽지 않자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월급을 조금씩 떼어서 모았고, 보화원은 이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강뉴부대는 휴전 후 평화유지 활동까지 한 후 1956년 3월 모든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536명이 부상했고, 121명의 고귀한 목숨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됐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병사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인근에 ‘한국촌’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지어 이들을 그곳에서 살도록 했고 연금도 지급했다. 그리고 황제는 1968년 5월에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춘천의 공지천에 마련된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황제가 머물던 자리엔 에티오피아를 알리는 문화관 겸 커피집이 들어섰다. 이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벳(집)’이라고 쓴 친필 휘호와 함께 외교행낭으로 커피 원두도 보내왔다. 한국 최초의 원두 커피집이 춘천에 생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들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경제가 피폐하게 됐고, 그 결과 1974년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말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피살됐고, 파병 군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웠다는 이유로 몇 명은 목숨을 잃었고, 연금과 재산도 빼앗겼다. 이후 참전용사들은 훈장을 헐값에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아주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다시 정권이 교체된 1991년이 돼서야 은혜를 절대 잊지 않는 대한민국은 이들에 대한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 이제 참전용사들의 평균 나이는 90대가 됐고, 작년 말 기준으로 66분이 생존해 계셨다. 우리 정부와 민간에선 연금을 지급하고, 병원을 지어 무료로 치료도 해주고, 개인기업에서도 백내장을 수술해 주는가 하면 그 후손들에게 직업 교육과 한국 유학 등을 비롯한 다양한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실 그들의 국명은 우리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에티오피아라 하지만 현지 발음은 ‘이디오피아’에 가깝다고 하며, 대사관에서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올해는 유엔군 참전 및 정전 71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든 유엔군 참전국과 참전용사들께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디오피아!’ 박재권 울산보훈지청 보상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