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지리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출발부터 존재했다. 첫 시선의 목적은 생존이었다. 살기 위해 주변을 살펴야 했고 자손을 위해 기록을 남겼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 기록은 그림이었고 오래 변하지 않는 도구가 암각화였다. 문자가 생기자 암각화의 시대는 끝났고 지도와 지리의 풍속이 문자로 남게 됐다. 울산의 자랑인 암각화와 대한의 자랑인 고산자의 대동여지도가 그 증좌다. 

 백두를 세 번 이상 올랐다는 전설의 주인공 고산자는 여지도에서 남송의 여조겸이 쓴 ‘한여지도(漢輿地圖)’ 서문을 옮겨 놓았다. 글은 이렇다. <큰 땅의 지도가 있은 것은 오래됐다. 한이 진을 멸망시켰을때, 소하가 지리서를 거두어 비로소 천하를 얻었다.> 유구한 세월 속 전해지는 조선 땅의 지리서를 두루 섭렵해 대동의 이름으로 여지도를 만든 뜻이다. 

 울산의 땅을 이야기 하면 오래전부터 바다건너 왜와 우리 땅이 얽히고 설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어진 질긴 인연이다. 왜의 세작들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 울산 땅 무룡에 올라 지리를 살피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산은 무룡이 으뜸이고 물길은 태화가 첫째다. 그 산과 물길을 따라 2,000년의 세월을 노략질과 살육으로 먹고 산 도적이 호시탐탐 노리던 땅은 회야의 곡창이었다. 그래선지 울산의 땅에는 설핏설핏 전설같은 왜와의 인연이 숨어 있는 지명이 남았다. 그 증좌가 오늘 울산여지도가 밟아보는 두왕이다.   

 지난 2015년 겨울 국립큐슈박물관에서 ‘고대 일본과 백제’라는 기획 전시가 열렸다. 369년에 백제가 왜왕(倭王)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七支刀)를 비롯해 백제의 많은 유물이 전시됐다. 놀라운 것은 전시회 안내문이다.

 박물관은 전시 의도에 대해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을 확인하고 두 나라 간의 오래되고 끈끈한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며 한글과 일본어로 병기된 전시 안내문에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한의 오랜 교류 역사를 단절시킨 불행한 일이었다. 많은 조선 사람과 문물이 일본군에게 약탈됐다. 식민시절에 일본은 조선을 철저히 탄압하고 황민화 정책과 강제 연행 등을 실시했고 조선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적었다.

 정치가 허구헌날 사과와 반성을 이야기하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 쭈뼛거리지만 역사를 아는 왜의 후손은 또박또박 과거를 직시했다. 그 현장인 큐슈는 도요토미가 급조한 나고야 성에서 조선침략의 발톱을 드러낸 땅이다.

 우리는 임진년의 조일전쟁을 한나절에 무너진 동래성전투로 시작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한 방향의 왜군은 서생을 지나 회야를 거슬러 울산 땅을 도륙했다. 그 진격의 방향에 길목으로 솟은 땅이 두왕(斗旺)이다. 두왕은 원래 도왕(島王)이라는 이름이었다. 울산과 가장 가까운 바다 건너 섬 대마도(對馬島)에 이 곳 출신 김씨가 왕으로 살았다는 전설이 근거다. 그 왕의 조상묘가 마을에 있어 도왕(島王) 혹은 도왕(道王)이라고 하지만 임금 왕(王) 자를 쓰는 것은 왕을 거역한다 하여 왕성할 왕(旺) 자로 고치고 섬 도(島), 길 도(道) 대신 말 두(斗)로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두왕은 1962년까지 울주의 땅이었다. 청량의 중심에 위치해 남으로 덕하, 북으로 남산 열두봉우리를 뒷배로 삼고 함월과 은곡 문수를 호위무사로 둘러싼 천하길지였다. 청량은 신라 때 자장이 당나라 청량산에서 수도하다 문수보살을 만나 진신사리와 석가모니의 가사를 받아 온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청정 도량이 깃든 땅이기에 청량 땅 문수산 아래에서 대가람 영축사가 천년 이후에야 흔적을 드러냈다.

 두왕은 조선조에 두왕당리(豆王堂里)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현대에 와서 울산광역시 남구 두왕동으로 굳어졌다. 두왕의 북쪽은 비취빛의 옥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는 옥동이 위치하고 동쪽은 선암, 남쪽과 서쪽은 회야의 허리가 휘감은 땅이다. 지금은 이 일대가 테크노일반산업단지와 대학의 연구기관들이 입지해 있고 남북으로 흐르는 두왕천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다. 

 조선조 중엽의 일이다. 풍수지리의 대가 국풍이 대구와 경주를 돌아 울산 땅을 밟았을 때 범상치 않은 왕의 기운을 남산 아래에서 느꼈다. 국풍이 지목한 혈맥은 두곳이었다. 동남의 돋질 방향으로 이어진 지세와 남서방향의 회야로 이어진 두왕골을 왕생의 기운이 있다고 쇠막대기를 두드렸다. 

 그런 연고인지 두왕골 일대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고려조의 어느날, 두왕골에 아홉 명의 아들을 둔 효자 김씨가 살았다. 김씨는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았지만 마땅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꿈에 백발노인이 감남무진 객줏집의 머슴이 되라고 일러주었다. 객줏집 머슴으로 살고 있는 어느 날, 상주와 지관이 인근 산에 삶은 계란을 묻는 것을 보고, 김씨는 그 자리에 생계란을 묻었다. 다음날 김씨가 묻은 생계란 가운데 하나에서 닭이 부화했고 이를 본 김씨는 그 자리에 아버지를 묻어 그 후손이 대마도 왕이 됐다. 영험한 땅의 기운을 믿은 사람들은 무덤이 있던 자리를 ‘대마도주등’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도왕이라 했다.

 풀어보면 두왕의 지세가 풍수지리의 금계포란형(錦鷄抱卵形)이라는 이야기다. 명당발복(明堂發福形)은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울산광역시장인 김두겸 시장이 이 곳 태생이다. 그런 자리에 울산의 미래 산업을 책임진 두뇌들이 핵심 연구시설에 모여 있으니 지리와 인문의 연결성은 예사롭지 않다. 

 마지막 팁 하나, 두왕과 직접적인 지리적 연관성을 가진 대마도는 일본식 이름으로 쓰시마다. 이 이름의 뿌리가 두시마라는 설은 두왕과의 연결성이 있어 보인다. 또 하나, 대마의 도주가 소(宗)씨였는데 부산에는 송(宋)씨가 건너가 왕이 된 것이란 기록이 있다. 놀랍게도 이 기록은 1740년 동래부지(東萊府志)에 실화처럼 나와 있다. 송씨의 조상 무덤이 동래에 있다는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울산과 닮았다. 영험한 땅의 기운을 왜국 섬나라 왕의 전설로 풀어낸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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