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찬 숲해설가·자연환경해설사
김학찬 숲해설가·자연환경해설사

 병오년(丙午年) 첫 아침, 소망 하나 가슴에 품고 통도사 비로암에 올랐다. 지난 여름부터 맘에 담았던 욕심이라 그새 간절해졌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 시리게 날 선 바람에 귓불이 쨍하게 따갑다. 차갑게 훅 빨려 든 숲향기에 가슴이 바닥까지 아릿하다.

 비로암 오르는 길은 양옆으로 키 큰 활엽수림을 지난다. 100년은 훌쩍 넘긴 완숙한 숲이다. 아름 굵은 나무들을 점호하듯 손꼽으며 나아간다. 서어나무, 굴참나무, 피나무…. 산사의 호젓한 숲길을 오롯이 누비는 걸음이 즐겁다. 숲 그늘 사이사이로 아른대는 햇살을 쫓는 놀이도 재밌다. 항간의 요란한 해돋이 맛집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비로암은 영축산을 등지고 천성산을 건너다보는 자리에 계단처럼 앉았다. 소나무와 대나무 숲을 병풍처럼 둘렀고, 발아래로 펼쳐지는 겹겹의 산 능선이 장관이다. 암자 옆 폭포와 계곡의 물소리가 청아한 것으로도 이름나 있다. 요사채 전각의 현판이 '관산청수(觀山聽水)'인 연원을 알만하다. 햇살 좋은 날, 요사채 아래 나무벤치에서 저 너머 천성산을 바라보며 계곡 물소리를 듣노라면 세속의 묵은 시름이 절로 씻겨 내릴 듯하다.

 암자 입구로 들어서면 소담하고 정갈한 뜰이 산객을 맞는다. 자작거리는 자갈길과 소박하게 가꾼 화초 돌담, 정성스레 다듬어진 조경수들. 절집의 다정한 마음과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 묻어난다. 뜰 가운데 우뚝 선 삼층석탑과 석등이 산사의 고즈넉한 정취를 더한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산속의 정원(庭園)이다. 그 규모야 태화강국가정원에 비할 바 아니지만, 산사의 정원에 깃든 고요하고 담백한 기품은 그에 못지않다.

 법당에 올라 삼배하고 묵은 소망 풀어놓는다. 천성이 미욱한 탓에 내내 끙끙대기만 했던 욕심이다. 새해엔 비우고 담담하게 걸어가리라 마음 다진다. 우선은 홀가분해졌다.

 법당을 물러나와 툇마루를 내려서자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겨울나무 한 그루가 시야에 박힌다. 뜰의 끝자리, 서편 요사채 앞으로 끌리듯 다가선다. 지난봄, 산사의 뜰을 하얗게 수놓았던 목련(木蓮)이다. 그 여리고 애틋했던 자태는 간데없고 잿빛 나목(裸木)으로 차갑게 떨고 있다. 왜 이토록 처연하게 버티고 섰는가.

 목련의 겨울은 생존을 위한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가을바람이 차가워지면 목련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가지마다 무성했던 잎들을 황갈색 낙엽으로 모두 벗어던진다. 붉은 열매와 주황색 씨앗도 새들의 먹이로 모두 내어준다. 혹독한 겨울을 대비해, 잎과 열매로 분산되던 수분과 영양분을 오직 생존의 에너지로 끌어모으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스스로 생장을 멈추고 제 살을 덜어내는 이 비움의 과정은, 비장한 생존 전략이다.

 모두 비워낸 가지 끝, 겨울눈 하나만 남겼다. 길쭉한 타원형의 봉오리로 외롭게 매달린 모습이 애잔하다. 한발 다가서면 느낌이 바뀐다. 회백색의 솜털이 빽빽하게 박힌 도톰하고 날렵한 맵씨가 늠름하다. 마치 먹을 듬뿍 머금은 선비의 매서운 붓끝처럼 기개가 힘차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하지 않았나.

 겨울눈은 목련의 아기꽃(花芽)을 품고 겨울을 난다. 봄에 피어날 꽃잎과 암술, 수술이 아주 작은 크기로 이미 완성돼 그 품속에 들어차 있다. 봄꽃을 위한 정교한 설계도다. 겨울눈의 임무는 그 생명의 씨앗을 품고 이 겨울을 버텨내는 것이다. 영하의 혹독한 추위, 수분을 앗아가는 건조한 공기, 살을 에는 매서운 칼바람…. 끊임없는 시련을 무릅쓰고 봄을 기다리며 이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겨울눈은 여러 겹의 비늘 갑옷과 촘촘한 솜털 외투로 이중 무장을 하고 겨울 추위와 맞선다. 비늘 갑옷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아기꽃을 보호하고 내부의 소중한 수분이 증발하지 않도록 막는 1차 방어벽이다. 솜털 외투는 촘촘한 공기층을 만들어 영하의 찬바람이 내부까지 닿지 않도록 차단하는 2차 단열재 역할을 한다.

 겨울눈의 이중 방한 시스템은 추위에 따라 유연하게 진화한다. 가을 무렵 비늘 갑옷만 걸쳤던 겨울눈은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12월이 되면 가장 바깥의 비늘을 스스로 벗겨낸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짐에 따라 솜털 외투를 꺼내 입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다.

 비늘이 벗겨지면 틈 사이로 보송보송한 솜털이 드러난다. 솜털은 따뜻한 공기층을 만들어 겨울눈의 온기를 지켜낸다. 덕분에 겨울눈은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겨울의 혹한을 버티며 인고의 시간을 견딘다.

 겨울의 끝자락, 얼음이 녹고 대지에 온기가 돌면 겨울눈은 마지막 준비에 들어간다. 2월 말쯤, 따뜻해진 날씨에 내부의 꽃잎이 점차 부풀어 오르면 솜털 박힌 비늘 갑옷을 순차적으로 떨어뜨린다. 이즈음 목련 나무 아래 강아지 털 뭉치 같은 작은 껍질들이 흩어져 있다면, 목련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 마지막 외투를 벗었다는 신호다.

 마침내 3월 중하순, 산사의 뜰에 봄기운이 퍼지면 붓끝 같은 겨울눈 봉오리에서 하얀 꽃망울이 단번에 터진다. 지난 여름부터 시작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1년 가까이 준비해 온 ‘겨울눈의 생존 시나리오’가 비로소 공개되는 순간이다. 산사의 봄은 그렇게 막이 열린다. 이 겨울, 목련의 처연함 저편에 이토록 치밀하고 야무진 생명의 설계도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무 한 그루 허투루 보아선 안 될 일이다.

 1월의 숲은 비우는 결단과 견디는 끈기의 시간이다. 겨울의 나무는 묵은 것을 떨구고 봄꽃을 위해 견디며 기다린다. 비우지 않고서 어찌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혹독한 겨울을 버티지 않은 꽃이 어찌 그 향기가 짙을 수 있겠는가. 가슴 속의 겨울눈이 봄 햇살 아래 싱그럽게 피어나길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그 희망의 기다림 한복판에 서 있다.

  뜰을 돌아 나오는 걸음에 뒤편 요사채 편액 하나가 눈길을 붙든다. '연화승(蓮花勝)'. 연꽃같이 아름다운 인연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수행자에겐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굳건한 기상를 뜻한다고 한다. 숙연해진다.

 

생명을 품은 비로암 목련의 겨울눈. 필자 제공
생명을 품은 비로암 목련의 겨울눈.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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