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불을 쏟아 붓는다 햇볕이 칼날이 돼 내리꽂히는 산하는 고통이다. 숨이 턱 막히는 불볕더위가 연일 더위수치를 갈아치운다. 모든 것이 달구어지고, 꽃과 나무들은 숨을 고르듯 잎을 늘어뜨린다. 그러나 이 혹독한 폭염 속에서도 담장을 타고 가장 붉게 피어나는 꽃이 있다. 바로 능소화다. 얼마나 그리움이 간절했으면 폭염 속에서도 담장을 타고 올라와 선홍빛 피를 토할까? "기다림과 그리움을 합해야 비로소 보고픔의 무게가 된다."는 말처럼, 보고품의 무게 달고 힘겹게 기어 올라와서 하늘을 향해 높게 피어있는 화려한 꽃잎은 오히려 처연해서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능소화는 예전에 궁궐이나 양반가에서 주로 심었다. 그래서 '양반꽃'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높은 곳으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과 화려한 주황빛 꽃이 고귀함, 존엄함, 명예를 상징해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급제한 인재에게 능소화를 어사화로 만들어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능소화는 단순한 여름꽃 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와 역사 속에서 품격과 이상사징으로 문인들의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전설은 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후 임금의 발길이 끊기고 홀로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로 전승돼 왔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가 머물던 담장가에 붉게 피어난 꽃을 보고 사람들이 이를 소화의 넋이 꽃으로 피어났다고 능소화라 불렀다는 설이다. 능소화의 꽃말이 말해주듯이 소화 전설에서는 임금을 기다린 마음이 투영돼 기다림과 그리움의 상징이 된 꽃이다.
한여름 담장을 타고 붉게 피어오르는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사람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능소화는 화려한 꽃이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뿌리는 땅에 깊이 내리고, 줄기는 담장을 타고 오르며, 마침내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운다. 그래서 능소화는 예부터 높은 뜻과 기다림, 그리고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하는 꽃으로 사랑받아 왔다. 한 사람을 향한 기다림, 끝내 꽃이 되어 하늘을 향해 오른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현대인은 지금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을 열면 몇 초 만에 원하는 정보를 얻고, 버튼 하나로 물건을 주문하며, 기다림은 불편함으로 여겨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마음을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은 줄어들고, 즉각적인 만족과 빠른 결과만을 요구하는 '빠름의문화'가 일상이 됐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게 말한다. 꽃은 계절을 재촉하지 않는다. 씨앗은 하루아침에 거목이 되지 않는다. 능소화 역시 한순간에 담장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햇빛과 비바람을 견디며 조금씩 위로 자라난다. 그 느림이 있기에 여름이면 누구보다 눈부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 또한 기다림의 산물이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 한 곡의 음악은 오랜 사색과 기다림 끝에 탄생한다. 깊이 있는 예술은 시간을 견딘 사람의 마음에서 피어난다. 오늘날 콘텐츠는 넘쳐나지만 오래 기억되는 작품이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깊이가 얕아진 것은 기다리는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향해 오르고 있는가.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재산, 더 큰 명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능소화는 담장을 넘지만 다른 꽃을 밀어내지 않는다. 자신의 길을 따라 조용히 오를 뿐이다. 경쟁보다 성장, 과시보다 성숙을 보여 주는 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이기려 하고, 대화하기보다 단정하려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능소화가 보여주는 '기다림의 미학'은 더욱 소중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기다림,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기다림, 더 나은 내일을 믿는 기다림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문학 역시 기다림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언어를 기다리고, 화가는 빛을 기다리며, 음악가는 침묵 속에서 한 음을 기다린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삶의 작은 떨림을 발견할 수 있다. 능소화는 바로 그 기다림의 가치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한여름 붉게 피어난 능소화를 바라보면 화려함보다 먼저 품격과 겸손함이 보인다.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제 계절이 오면 묵묵히 피고, 때가 되면 조용히 진다. 그 짧은 생애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이 된다.
이병근 시인·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