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새벽 찬 공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산책길 낙엽 닿는 소리에 발밑이 움찔한다. 여름내 쟁쟁하던 매미 울음도 뜸해졌다. 이 마을 숲이 모두 제 것인 양 얼마나 들쑤셔 댔던가. 고작 한여름을 넘길 뿐이면서.
길섶의 배롱나무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올여름 이 외진 숲 한켠을 붉게 지켜 준 살가운 길동무다. 여름 동안 흐드러졌던 꽃이 가지 끝에 드문드문 남았다. 뜨겁던 진분홍도 빛이 바래 옅고 성글다. 비스듬히 내려앉은 아침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치열했던 붉음이 애잔하다.
멈춰 선 발치엔 떨어진 꽃잎이 말라 가고, 꽃을 떨군 가지엔 갈색 열매가 여물고 있다. 푸르렀던 잎도 가만히 물들 채비를 한다. 남은 꽃, 지는 꽃잎, 여무는 열매, 물드는 잎. 긴 여름을 건너온 나무 한 그루에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첫머리가 나란히 걸려 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불린다. 붉은 꽃을 백 일 가까이 볼 수 있어서다. 백일홍이 ‘배기롱나무’로 소리가 바뀌었다가 지금의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전한다. 경상도에서는 매끈한 줄기를 살살 긁으면 간지러운 듯 가지가 흔들린다 하여 ‘간지름나무’라고도 한다.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나.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이다. 이 나무는 어째서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단 말인가.
비밀은 꽃들의 이어달리기에 있다. 꽃 한 송이가 백 일을 버티는 것이 아니다. 가지 끝의 꽃봉오리가 차례로 피고 진다. 이 가지에서 꽃이 지면 저 가지에서 새 꽃이 열린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화사(茶山花史)」에서 ‘일지영창일지쇠(一枝榮暢一枝衰)’라고 읊었다. 한 가지가 활짝 피면 다른 한 가지는 시들어 간다는 뜻이다.
배롱나무는 봄꽃들이 화려한 무대를 내려온 뒤에야 제 꽃을 피운다. 볕이 가장 사납고 기온이 치솟는 한여름이 제 시간이다. 꽃이 귀한 철이라 더 반갑다. 울산에선 7월에 피기 시작해 8월에 절정을 이룬다. 태화강 산책로와 울산대공원 동문 안쪽 호숫가, 중구 약사제방유적전시관 앞 바람산책길도 이 무렵이면 진분홍 꽃으로 환하다. 9월 중반을 넘어서면 그 기운도 차츰 잦아든다.
한 발짝 다가서서 들여다보면 꽃은 뜻밖에 여리다. 크레이프 종이처럼 얇고 주름진 꽃잎 여섯 장이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로 수많은 수술이 모여 난다. 그 가녀린 꽃들이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석 달 넘게 마을 숲을 붉게 지켜 냈다. 머리 위에선 매미가 저뿐인 양 목청 높여 울어 대던 그 시간을 견디면서.
배롱나무는 옛 선비들이 아끼던 나무다. 서원과 향교, 고택 정원에서 쉽게 만난다. 해마다 묵은 껍질을 벗어 내고 맑고 매끈한 속살을 드러내는 줄기는 청렴하고 담담한 선비의 삶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학교나 연수원 같은 배움의 공간에서도 흔히 보인다. 절집 마당에서 백 일 가까이 꽃을 이어 가는 모습은 긴 수행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백 일을 붉었어도 자연의 흐름과 생명의 이치를 거스를 순 없는 법. 바람이 선선해지고 낮이 짧아지는 이즈음, 나무는 꽃에 쏟던 힘을 열매로 넘겨준다. 꽃이 지는 일과 씨앗이 여무는 일이 한 가지, 같은 자리에서 조용히 손바꿈한다.
배롱나무가 오래 붉었던 것은 한 송이가 끝까지 버텨서가 아니다. 질 줄 아는 꽃이 있었고, 때맞춰 뒤를 받치는 꽃이 있었기에 나무는 오래 붉었다.
가지 끝에 꽃 한 송이가 아직 붉다. 길어야 백 일뿐이거늘, 지는 순간까지 제 몫의 붉음을 다한다.
김학찬 숲해설가·자연환경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