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남산은 주봉인 금오산(金鰲山)과 고위산, 도당산을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남산을 서쪽 방면인 단석산에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는 형국(形局)을 하고 있다고 풍수가들은 이야기하기도 한다.

 도당산(都當山)은 자라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일명 장두산(檣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장(檣)은 한자로 '돛대 장(檣)' 자를 쓰는데, 배의 돛대와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대궐터였던 반월성과 가장 가까운 산으로,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에서 불국사 방면으로 이어지는 산업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인공 터널인 도당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그 터널 위쪽에 솟아 있는 산이 바로 도당산이다.

 이 산은 신라가 멸망하면서 많은 곳이 피폐해졌다. 곳곳에는 공동묘지를 방불케 할 만큼 수많은 무덤이 들어섰고, 도로가 생기면서 산자락이 파헤쳐져 옛날의 성스러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버렸다.

 구전에 의하면 도당산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건국 이전부터 육부의 촌장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고, 신라 초기의 임금들은 이 산에서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 봉황대(고분)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 중엽까지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면서 왕권과 국가의 기강이 서서히 무너지고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분열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였고, 궁예(弓裔)가 이끄는 후고구려와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가 등장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은 경애왕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신라는 나라를 지탱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를 신하들과 논의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당시 라말여초(羅末麗初), 즉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도읍지나 집터, 무덤터, 절터의 지세가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다.

 어느 날 한 풍수장이가 고려 임금 앞에 나타나 이렇게 아뢰었다고 한다.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의 지형은 배(舟)의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지금은 그 기운이 약해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신라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서라벌의 배를 아주 침몰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 일을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고려 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승낙하였다.

 풍수장이는 다시 신라 임금을 찾아가 말했다고 한다.

 "신라의 서울 서라벌은 봉황새의 둥우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천년 동안 영화를 누려왔습니다. 이제 그 기(氣)가 다하여 봉황새들이 둥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신라 임금은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렇다면 봉황새가 날아가지 않고 붙잡아 둘 방법은 없는가?"

 풍수장이는 대답했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서라벌에 봉황새의 둥우리와 같은 둥글둥글한 큰 알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면 봉황새들은 알을 두고 둥지를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임금은 그 말을 믿고 산더미처럼 큰 알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지금의 황남동과 노서동 일대에 왕릉처럼 둥글둥글하게 솟아 있는 봉황대(고분)들이 바로 그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풍수장이는 그 후 미추왕릉(味鄒王陵) 부근의 밤나무 숲에 남몰래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우물을 율림정(栗林井)이라 하였는데, 이야기 속의 우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추왕릉 부근에 실제로 우물이 존재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최후의 막을 내리게 된 것도 이 우물과 많은 봉황대(고분)들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진하는 배 모양으로 생긴 서라벌 땅에 둥글둥글하게 만들어 놓은 봉황새의 알 , 즉 고분들은 배에 실은 무거운 짐이 되었고, 미추왕릉 부근에 파놓은 우물 율림정은 배 밑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격이 되었으니 배는 결국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산더미처럼 큰 고분들을 무덤으로 알지 못했던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배의 돛대에 해당하는 장두산(檣頭山)의 혈맥을 끊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왕정골에서 식혜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깊이 패여 있는데, 그것이 산맥을 잘라 놓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찬란했던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가 풍수장이의 말을 믿고 비보(裨補), 즉 풍수지리에서 땅이나 건물의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하고 흉한 기운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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