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브르 박물관과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미테랑 대통령이 세운 ‘유리 피라미드’가 눈길을 끈다.

문화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약 2,500여개나 된다. 이 가운데 3대 미술관과 박물관은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센터 5~6층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루브르에는 고대에서 18세기까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오르세에는 19세기의 작품, 그리고 퐁피두센터의 국립현대미술관에는 20세기까지의 현존하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들 3대 미술관에 가면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거의 파악할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12세기 말경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필리프 2세가 축조한 성채를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새롭게 증축한 궁전이었다. 왕실 소장품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유명 작품과 고대 조각 작품을 소장하게 되면서 루브르는 점차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겨가면서 루브르는 아카데미가 주도하는 전시장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터는 ‘중앙 미술관’으로 부르게 되었고, 나폴레옹 시대에는 그의 전리품들이 루브르를 채우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미테랑 대통령이 ‘궁전 전체를 미술관으로’라는 그랑 루브르 계획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단행했다.

미술관·박물관 2,500여개나

루브르 궁전의 중앙 정원인 나폴레옹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가 들어선 것도 이때였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설계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1989년에 완공됐다. 설계한 건축가 때문인지, 우연인지 유리 피라미드 주변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루브르 박물관 구경은 유리 피라미드 입구를 거쳐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면 거대한 나폴레옹 홀이 나오고 역대 재상의 이름을 딴 리슐리(Richelieu)관과 쉴리(Sully)관, 개관 초기의 총책임자 드농(Denon)관으로 갈 수 있다. 전시관은 중동관, 이집트관, 그리스 로마관, 회화관, 조각관, 장식예술관,그래픽 예술관 등 일곱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대 오리엔트부터 18세기까지의 조각, 회화, 데생, 미술공예품 등 35만점이나 되는 컬렉션을 자랑하는 루브르 박물관은 그중 10분의 1도 안되는 3만5,000점만을 전시하고 있다. 이를 다 보려면 60㎞를 걸어야 하며 그냥 걷기만 해도 열다섯 시간이 걸린다. 작품 당 10초씩만 머문다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관심있는 곳의 동선을 미리 짜서 최대한 볼 수 밖에 없다.
이탈리아인 레오날드 다빈치(Davinci)가 그린 ‘모나리자’나 ‘세례 요한’ 등이 루브르에 걸려있는 이유는 나폴레옹 때문이 아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문화 예술을 가장 아낀 왕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때 다빈치의 재능에 반했고 온갖 혜택을 내세워 프랑스로 초청했다. 자신이 어린시절을 보낸 성에서 다빈치가 살도록 했고, 그를 후원하면서도 자기 초상화나 그리라고 하지도 않았다. 다빈치는 돈 걱정, 작품 걱정 하지 않고 윗사람 눈치를 볼필요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이같은 왕의 우정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 ‘모나리자’와 ‘세례 요한’이다. 왕과 천재 예술가의 순수한 교류가 프랑스 예술의 품위를 한 단계 더 높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상대로 ‘모나리자’ 앞에는 관람객들이 떠날 생각을 않고 작품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서양 미술사는 3대 미술관에

▲ 프랑스에 초청돼 작품 활동을 한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 왕에게 선물한 ‘모나리자’.
르네상스 시기에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화가를 모셔올 정도로 회화에 관심이 많았으나 프랑스에는 대표적인 화가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예술의 수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왕은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의 힘을 믿었다. 다빈치를 모신 프랑수아 1세에 이어 루이 14세는 왕립 회화 아카데미, 건축 아카데미를 정비했고 이탈리아에 아카데미 드 프랑스를 세워 선진 예술을 배우게 했다. 프랑스는 이처럼 권력자의 지원 속에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프랑스대혁명 전까지 루이 16세의 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Louis David)는 고전적이며 완벽한 구성과 조형미를 갖춘 프랑스 미술의 정점에 선 화가였다. 격동의 프랑스 역사속에서 다비드는 여러번 정치적 입장을 바꾼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혁명정부를 지지하며 루이 16세 처형에 적극 찬성한다. 궁정화가가 단두대행을 피한 것만도 놀라운데 혁명정부의 화가가 된다.
그는 왕실의 몰락과 혁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쿠데타로 집권하여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화가로 부활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숱한 사람이 단두대에 오르고 타국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지쳐서 안정을 원할 때쯤 등장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 집권 직후 ‘사비네 여인들의 중재’라는 작품을 공개한다. 역사를 모르더라도 이 그림에서는 ‘이제 그만 싸우자’는 메시지가 읽힌다. 아래쪽에 놀고 있는 아기를 보면서 어떻게 싸움질을 하겠는가. 다비드는 또 한번 정치색을 바꾸었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리는 영광을 차지한다. 그는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역사가 낳은 독특한 이력의 화가였다. 그의 정치성에는 동의할 수 없다해도 천재의 그림에는 모두가 설득될 수 밖에 없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유럽은 본래의 체제를 되찾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에 다시 왕을 세우기로 하고 루이 16세의 동생이 즉위한다. 뒤이은 샤를 10세는 평등과 자유에 입각한 혁명정신을 거부하고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려 한다. 이를 그냥 보고만 있을 프랑스 인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1830년 7월 혁명이다. 혁명은 결국 샤를 10세를 몰아냈고, 낭만주의도 예술사에서 혁명적인 흐름을 타고 큰 영향을 미쳤다.

서민주택 대신 문화시설 골몰

절대왕정과 교회를 비호하는 데 쓰이던 예술은 마침내 시대를 읽고 사회를 고발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왕을 위해 지어졌으나 인민의 손으로 넘어온 루브르 궁전에서는, 권력의 편에서 출발했으나 치열한 고민과 갈등을 통해 예술을 화가와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든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절대 왕정이 무너진 후 왕정과 공화정을 혁명과 쿠데타로 번갈아가며 혼란과 진통을 겪었던 프랑스는 현재 제5공화국에 이르렀으며 그 첫 대통령은 샤를 드골이었고 지금 엘리제 궁의 주인은 2012년 5월에 취임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다.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 미테랑은 1981년 취임 직후 ‘그랑 프로제(큰 계획)’라는 획기적인 문화진흥에 나섰다. 오늘날 관광명소가 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루브르의 피라미드 등이 이때 등장했다. 사치스러운 극장이나 박물관 대신 서민 주택이나 빨리 지으라는 사람들의 반발에도 미테랑 대통령은 문화시설에 골몰했다.
하지만 왕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크고 화려한 루브르를 후세에 남겼겠는가. 궁전은 대혁명때 인민의 것이 되었다. 예술 또한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시민의 공동 재산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루브르는 문화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전당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