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7월 24일 신양호 진수식.
1963년 7월 24일 신양호 진수식.

 

 1945년 해방 직후, 패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큰 선박들은 전부 같이 철수했기에 우리나라에는 100t급 이하의 작은 배들 뿐이었다. 그 작은 배도 고장나면 일본에 끌고 가서 수리해야 했다. 당시 한국은 철강 조선(造船)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1961년 5·16 혁명정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하 박정희)은 조선업(造船業)을 육성하기로 도전했다.

 1961년 11월 11일 도쿄, 세계적인 선박 검사기관인 영국 ‘로이드선급(船級)’이 일본에 파견한 검사관 신동식(申東植·1932~)에게 주일 대표부(현재 대사관)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정희의 도쿄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그 자리에는 정래혁 상공부장관, 박태준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 이영진 조선공사 사장 등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몇몇은 박정희와 함께 미국으로, 몇몇은 차관과 기술이전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갈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신동식은 "의욕과 정열만 가지고 기술을 달라, 돈을 달라한다고 덥석 주겠습니까?…"하면서 먼저 일본의 조선산업 전반을 둘러볼 것을 권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신동식의 이 당돌한 의견에 찬성하고 서독 일정을 늦추고 먼저 일본 조선 현장을 둘러보라고 즉석에서 지시했다. 

 신동식은 2주간에 걸쳐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부터 남쪽의 규슈까지 걸쳐있는 조선소들, 예시하면 도쿄의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石川島播磨重工業), 요코하마의 NKK, 고베의 히타치 등의 조선소와 제철소, 공작기계 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을 마련했다. 이런 방문 일정은 당시 신동식이 선박을 건조할 때 필요한 자재에서부터 건조 과정까지 감독하는 영국 로이드 검사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2년 12월, 박정희는 어업차관계획 안을 논의했다. 그 안(案)은 한국은행 보유외화의 절반을 들여 이탈리아 피아트사에서 중고(中古) 선박을 수입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고 선박으로 원양어업에 나서서 참치를 어획하고 통조림을 만들어 수출해 어선차관을 지불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당시 민병도(閔丙燾·1916~2006) 한국은행 총재가 ‘통조림을 수출하려고 국가 경제의 최후 보루인 외환보유액을 허물 수는 없다’고 완강히 반대했다. 만약 꼭 그래야 한다면 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뜻밖의 강한 반론에 그 계획안이 보류됐다. 회고하면 조선강국(造船强國)으로 진출하기 위한 국가 경제 계획에서 박정희와 당시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의 고민이 융합해 대한민국 조선업이 시동됐다.

 당시 박정희가 제1차 경제개발 최종계획(안)으로 내세운 조선(造船) 계획은 자기자금 10%, 정부보조금 40%, 융자 50%, 연리 3.5%, 15년 상환 그리고 철강재, 목재 등 도입 원자재의 관세(關稅)면제 등으로서, 당시 경제상황으로 볼 때 정부의 그 지원계획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음은 이 과정에서 일이다. 박정희는 혁명 후 육군 대령 이영진을 부산 영도에 위치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 사장에 임명했는데, 당시 조선공사에는 수리 선박 군산호가 제일 큰 고객이었다. 이때 군산호 수리감독 신태범(愼泰範·한국해양대2기·선장)의 아이디어와 이영진의 적극적인 자세가 마주쳐 박정희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효과적으로 ‘조선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되기에 이르게 한다.

 이 시기 일본이 계획조선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신태범이 이영진에게 다음 아이디어를 권했다. 조선사업의 첫 과제는 선박 설계도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선박 설계전문가가 사실상 전무했다. 이에 신태범은 선장(船長) 일을 할 때 일본을 왕래하면서 목격했던 일본의 ‘계획조선’에서 해답을 찾으면 참고가 될거라는 건의를 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중소형조선공업협회로 하여금 일본 조선기술진을 망라한 위원회를 구성하게 해, 500t, 1000t, 1600t, 2000t, 2600t의 다섯 가지 표준선박의 설계도면을 만들어 조선(造船)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해운집회소가 그들의 월간지 『해운(海運)』에 표준선박의 설계도면 작성을 주도한 실무자가 「1600t형 화물선의 표준 기본설계 작성에 대해」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태범은 일본의 이 『海運』지를 구해 한국조선공사 기술진과 함께 정독하고 일본 ‘계획조선’을 연구했다. 일본에서는 이 설계도면으로 이미 여러 척의 선박이 건조돼 운항 중이었고, 그중 몇 척은 부산항에 기항하고 있었다. 이에 신태범은 부산항에 나가 일본의 ‘계획조선’ 선박이 눈에 띄면 조선공사 기술진과 함께 그 선박에 올라 선장과 면담하는 척하면서 배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관찰했다. 기관실의 부품 상표까지 확인하고 담당 해기사(海技士)에게 기관(機關)의 성능에 대해서도 문의했다. 그 결과 기관은 ‘니가타(新潟) 엔진’ 성능이 좋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1963년 7월 24일! 드디어 정부 주도 경제개발계획에 의해서 대한조선공사에서 우리 기술진이 최초로 건조한 2000t급 화물선 신양호의 진수식(進水式)이 거행됐다. 길이 77m, 선폭 12.2m의 이 철강선은 지금까지 이 땅에서 건조한 선박 중 최대 규모의 대형선박이었다. 참으로 한국의 조선사(造船史)에 기록될 감격스러운 쾌거였다. 이 배는 한·일간 정기선으로 취항했다. 2024년 오늘! 세계 최대 조선(造船) 국가 대한민국을 구가하는 위치에서 보면 당시 2000t급의 소형선에 흥분했던 지난날의 우리 모습이 씁쓸하지만, 60년대 초 당시 신양호의 국내 건조는 실로 한국의 조선과 해운 발전에 신기원이고 대사건이었다. 

그렇다! 1960년대 한국의 초기 조선 주역자들은 ‘기적’을 일으켰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 박사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