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 대해선 어머니가 말했다. 타고난 건 아니었어. 대청마루에서 베개를 가지고 놀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를 다쳤어. 다리 염증이 척추까지 번져 저렇게 등이 굽어버렸다오. 유명하다는 일본인 양의를 붙였는데도 말이야. 남들 다 가는 학교도 못 가고……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제대로……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그 대목에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었다. 내가 나설 때였다. 아니에요. 대신 어머니가 한글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수예와 뜨개질로 무료한 시간 보내도록 했고요. 아버지가 경성까지 다니시며 책과 잡지를 구해주신 은혜도 잘 알아요…… 그런 말로 어머니 마음을 녹여야 했지만, 나는 빈 벽만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도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였다. 신이나 운명에 해야 할 종주먹질이고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시시때때로 삐딱해졌다.
석중이 잠시의 침묵을 깼다. 밥값 요량이었는지 어머니에게 나를 대단한 시인으로 치켜세웠다. 1925년 4월호 『어린이』에 실린 「봄편지」를 두고 버들잎에 우표 붙여 강남으로 보내는 발상과 그 편지 본 제비가 다시 찾아온다는 표현이 놀라운 작품이라 했다. 벌써 2년 전, 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창간호부터 애독했던 잡지에 내 시가 뽑히면서 나는 병신 아닌 또 하나의 나, 시인 자아를 얻었다. 작년엔 윤극영 선생의 작곡으로 이어졌고 그 악보가 『어린이』에 실리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석중의 입담에 어머니는 내내 온 얼굴로 웃었다. 나는 과분한 선물을 갚듯 어머니에게 석중이 나보다 일 년 빠르게 『신소년』으로 등단하고 나와 같은 해에 『어린이』에 「오뚜기」로 당선되었다고 말했다. '기쁨사' 동인을 만든 이가 이렇게 어린 줄 몰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눈부신 듯 석중을 쳐다보았다.
그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여기 서덕출 씨 집 맞습니까?"
대문 두드리는 소리도 처음부터 컸다. 언양 사는 신고송 씨일 겁니다. 의아해하는 내 시선에 답하며 석중이 얼른 일어났다. 석중이 앞서고 어머니가 뒤따라 나갔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남녀 사이에만 통하는 게 아니었다. 나와 석중, 고송은 만나자마자 몇 년 세월을 건너뛰었다. 『어린이』로 교류했던 발표작, 함께 읽었던 책,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기에 급속히 친해졌으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방정환 선생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점도 같았다. 나와 고송은 동갑이고 석중은 한참 어렸지만 우리는 서로 존대했다. 석중의 진중함이 나이를 잊게 하기도 했거니와 야, 너, 형님, 동생 하면서 층하를 두는 게 싫었다.
태화강으로 나갈까 하다가 본정통 구경으로 의견이 모였다. 자연보다는 문명이 좋은 나이였다. 주전부리를 꾸려준 어머니가 손님 접대하라며 냉면값을 챙겨주었다. 그런데 고송이 한사코 나를 업겠다고 했다. 혈기 왕성하고 기골 장대하다고 자랑하고픈 건가, 나는 부끄럽고 민망했다. 짜증스럽기도 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날씨인데 뜨거운 짐짝을 등에 업고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 하지만 석중까지 거들자 난처한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칠복이 물러나 버렸다. 손님에게 화낼 수는 없는 법, 나는 할 수 없이 고송의 등에 내 가슴팍을 댔다. 어제 저녁밥을 양껏 먹고 간밤에 내온 참외까지 달게 먹었던 걸 후회하며 나는 숨을 참았다. 잠시 휘청거리던 고송이 바로 섰고 내 엉덩이를 잡고 있던 석중이 자기 손을 뗐다.
우리 집이 속해 있는 복산동에도 십여 년 전부터 일본 가옥이 생겨나긴 했으나 중심지는 여전히 북정과 성남이었다. 우리는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고송은 업고 나는 업히고 석중은 팔을 뻗어 내 머리 위로 양산을 펼쳤다. 기이한 행렬이었으니 흘끔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병신 새끼 주제에 집에 처박혀 있지, 라는 말도 들렸다.
울산공립보통학교 앞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서양식 2층 교사를 지어 올린 울산 최초의 6년제 보통학교, 내가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던 학교였다. 우리는 팽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고송의 등짝에서 땀이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계속)
#작가 소개 : 강 미 소설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지내며 아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어 청소년 소설을 썼다. 청소년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 『안녕, 바람』 」밤바다 건너기』 『겨울, 블로그』 『길 위의 책』 『키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논픽션 『동네책방 분투기』 『조강의 노래』를 출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