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송은 길에 선 채로 양편을 소개했다.
"모두 이름들은 알고 계실 거고요. 이 형님 집에서 가난한 우리 모자가 아래채 빌려 의탁하고 있어요. 소년운동 하시다가 지금은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이고요.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래요?"
고송이 석중과 정인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방학이라 집에 왔는데 자네가 글벗들 모인다고 서덕출 씨 집에 갔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달려왔지. 이 동네라는 건 들었지만 정작 와 보니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봄편지를 불렀어. 혹시라도 누가 나타나 서덕출 씨 집을 가르쳐줄지 모르겠다 싶어서."
"하하, 형님답소."
"이럴 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시지요. 보시다시피 고송 씨가 지금 고역입니다."
나의 말에 모두 그렇다면서 멀리 보이는 능소화 담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걸어가면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정인섭은 유학생답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조선 소년들이 읽고 조선의 설화도 외국에 퍼뜨려야 한다고 했다.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해외문학연구회도 조직했다고 했다. 가난한 고송이 보통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금융조합 급사로 일하다가 겨우겨우 사범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정인섭은 좋은 두뇌와 유복한 가정, 마음먹은 대로 실행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로 와세다대 물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속에서 부러움과 자괴감이 쌍으로 몰려왔다. 틈만 나면 튀어 오르는 못난, 그러나 내칠 수 없는 녀석!
저녁은 평상에서 먹었다. 어제는 빙빙 돌며 낯가림하던 동생들이 두레상에 함께 앉았다. 나와 열 살 이상 터울 지는 동생들은 석중을 더 따랐다. 경성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하기도 했지만 이거 뭐냐, 저건 어떻게 쓰냐는 질문으로 동생들이 지지배배 이야기하게 했다. 말린 쑥으로 모깃불도 함께 피웠다. 수박과 참외를 먹고 육 척 장군 같은 고송은 두 어깨를 우쭐거리며 동생들을 데리고 바지랑대 춤을 추었다.
석중은 어디서 찾았는지 저만치서 내 비밀 잡기장을 읽고 있었다. 얼른 뺏어오라는 내 말에 동생들이 달려들고 석중은 다른 쪽으로 뛰고 동생들은 우르르 뒤쫓았다. 그 바람에 마룻장 하나가 내려앉고 숟가락 통이 엎어졌다. 지켜보던 어머니도 누이도 소리 내어 웃었다.
정인섭을 배웅하고 난 뒤 석중은 동생들을 앞세워 밤마실을 나갔다. 고송은 평상에 누워 별바라기를 하는가 싶더니 낮게 코를 골았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8월 한낮, 힘든 기색 없이 나를 업고 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시큰거리는 마음으로 고송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 다행이다, 모깃불 연기가 있어서
내게 찾아와준 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이런 순간이 익숙한 일인 듯 칠복은 나를 방에 내린 다음 종이와 붓을 펼쳐 주었다.
다음 구절을 머릿속에 공글리는 중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다리에 둥근 인두가 닿은 듯, 전류가 흐르는 듯 뜨겁고 찌릿했다. 발가락 끝마디까지 뻣뻣하게 굳어 꼼짝할 수 없었다. 대번에 식은땀이 나고 굽은 척추 곳곳이 송곳에 찔리는 것 같았다. 좁은 방이 캄캄한 황무지가 되고 방문 옆 호각은 십 리 밖에 있었다. 통증보다 차라리 죽음이 나았다. 죽어야지 하고 혀를 깨물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윗니 아랫니 사이가 벌어지며 속엣것들이 역류했다. 한쪽 얼굴을 댄 방바닥에 밥알이며 냉면 가닥이 뒤섞여 나와서는 다시 얼굴에 닿았다. 시큼한 냄새를 동반한 뜨뜻미지근한 토사물이었다. 나는 용을 써서 머리를 들었다. 죽겠다 하면서도 기도가 막힐까 걱정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꼽등이가 토사물 위에 앉았다. 꼭 나를 닮았다. 눈물이 흘렀다.
꼽등이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까무룩 멀어지는 정신에도 마당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용케 들렸다. 석중과 동생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석중에게 가닿기를 소망하며 마음으로 말했다. 제발 들어오지 마시오, 그길로 경성으로 가 버리시오, 이 방에 오지 말고 고송처럼 평상에서 잠자시오, 그도 아니라면 밤새도록 오동잎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듣든지 하고많은 별을 헤아리시오…… (계속)
# 작가 소개 : 강 미 소설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지내며 아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어 청소년 소설을 썼다. 청소년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 『안녕, 바람』 」밤바다 건너기』 『겨울, 블로그』 『길 위의 책』 『키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논픽션 『동네책방 분투기』 『조강의 노래』를 출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