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그림
배호 그림

하지만 곧 툇마루가 삐걱거리고 낮은 음성이 일렁거렸다. 긴 원통을 울리는 소리, 담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 같았는데 나는 내 이름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토사물을 덮으려고 시구 적은 종이를 잡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팔이 닿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고 놀라는 소리, 나를 흔들며 내지르는 소리, 사람을 부르는 소리…… 나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대로 동생의 세계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신월아, 이제 정신이 드니?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나를 신월로 불렀다. 나도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다.

"아픈 건 어떠냐? 옷 갈아입자."

그사이 나는 요 위에 눕혀져 있었고 방바닥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정말 아팠던 것인지 한바탕 악몽을 꾼 건지 헷갈렸다.

"벗, 벗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못 거들게 했다. 밖에 나가 있으라 했어. "

늘 내 마음 짚어주는, 알아서 갈무리해주는 어머니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끼니며 잠자리며, 여름 손님 치른다고 힘드시지요?"

"무슨 소리, 마음은 극진한데 대접이 변변찮아 미안할 뿐이다. 올해 우리 형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어머니 가슴에 평생 대못 박고 있는 나는 윗몸을 일으켜 어머니 손을 잡았다. 계봉이 죽을 때도, 아버지가 우리 보는 앞에서 수갑 채워져 부산까지 압송당할 때도 의연했던 분이다. 아버지는 학성을 일본성으로 복원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 돈으로 조선인 중학교를 세우려 했던 민우회 주동자였다. 집안에서 인맥을 대고 재산을 헐어 풀려나긴 했으나 매일 가택수색을 당해야 했다. 집안의 장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안해하는 동생들에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다독이는 일뿐이었다. 야키이 순사는 내가 발표한 동시와 소년시를 흔들며 내선 정책에 어긋나지 않는지 어깃장을 놓기도 했지만 나는 울분을 삼켜야 했다. 분노의 눈길과 떨리는 손은 뜨개질로 숨긴 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시구를 공글렸다.

"신월아, 나는 말이다, 저 벗들이 떠나고 나면 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다. 내가 수예도 뜨개질도 가르쳐주긴 했으나 네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 싫다."

내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다니, 역시 어머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태 편지만으로도 잘 만났는걸요. 이 만남은 덤으로, 선물로 여길 겁니다. ……잠자리를 이렇게 나란히 봐주셨네요. 이제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까운 시간,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나는 중앙유치원이라는 팻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린이』에 실렸던 글이나 방정환 선생의 편지글에서 접해보긴 했으나 유치원이라는 단어가 신기했다. 비가 오는 밤인데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우산을 털며, 복도를 걸어가며 부인들끼리 남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건대 소년단체 관계자, 유치원과 보통학교 교원들로 보였다. 자연스레 들리는 말에 미소 짓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놀랍게도 나는 지금 경성 인사동에 와 있고, 두 발로 걷고 있었다. 몸을 꼿꼿하게 한 채 사람들을 뒤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초대받은 사람인 양 들어가 끝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잠시 뒤 행사가 시작되었다. 동경에 가 있는 조선 유학생들이 조직한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가 주관한 '동요회'였다. 단상 가까이 있는 석중은 먼발치에 알아보았고 그 옆에 선 분은 방정환 선생 같았다. 『어린이』에서 만난 글이나 개인 편지로 상상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동요를 통해 조선의 어린이가 자긍심과 희망을 품도록 하자는 취지로 노래 발표가 이어졌다. 노래가 끝나면 사회자인 방정환 선생이 시인 이야기를 했다. '고향의 봄' 노래에 이어 이원수를 소개하고 '고드름' 노래 다음에 윤석중을 소개하는 형태였다. (계속)

 

         강 미 소설가
         강 미 소설가

# 작가 소개 : 강 미 소설가

울산에서 국어교사로 지내며 아이들의 삶을 공유하고 싶어 청소년 소설을 썼다. 청소년 소설 『사막을 지나는 시간』 『안녕, 바람』 」밤바다 건너기』 『겨울, 블로그』 『길 위의 책』 『키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논픽션 『동네책방 분투기』 『조강의 노래』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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