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에서 시작된 '시간여행'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김섭 울산대학교 미술학부 명예교수. 이수화 기자
반구대 암각화에서 시작된 '시간여행'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김섭 울산대학교 미술학부 명예교수. 이수화 기자

"처음엔 반구대 암각화가 뭔지도 몰랐죠. 막상 시도해 보니 제 그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어요."

김섭 울산대 미술학부 명예교수의 화폭에는 암각화에서 시작된 '시간여행'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수천 년 전 바위에 새겨진 동물의 형상들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되살아나고 있다.

김섭 전 울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와 마주한 뒤, 삶과 감정을 담은 새로운 회화 세계를 펼쳤다.

암각화와의 인연은 울산에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김 교수는 1998년 울산대 미술대학이 생기면서 초대 교수로 울산에 내려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암각화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울산에 처음 왔을 땐 반구대 암각화가 뭔지도 잘 몰랐어요. 초창기에는 '인간의 조건'을 주제로 교육, 사랑, 종교 같은 주제를 다룬 작업을 하고 있었죠. 암각화는 제 화풍과는 거리가 있는 줄 알았어요."

테마가 바뀔 때마다 작업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김 교수의 창작 작업의 특성이다.

그런 그에게 암각화는 천천히, 그러나 깊이 스며들었다. 울산에서 여러 문화 현장을 다니던 중 반구대 암각화를 접했고, 처음 암각화 현장에 갔을 때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아 직접 사진을 찾아보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을 통해 본 고래, 사슴, 호랑이 같은 동물 형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고 원시적인 선 속에 담긴 고대인의 감정과 의도가 마치 작은 이야기들처럼 다가왔다.

시간여행 III( Time Travel lll ) Mixed media on Canvas 2014
시간여행 III( Time Travel lll ) Mixed media on Canvas 2014

'시간여행'이라는 제목의 시리즈가 그렇게 탄생했다.

암각화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이를 모티브 삼아 화면을 다채롭게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김 교수는 아크릴 물감에 양초를 섞어 바위 질감을 만들었고, 수성이 스며들지 않도록 처리해 화면에 생명감을 더했다. 선 드로잉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감정과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담았다.

애정, 유혹, 편견, 교만 같은 감정을 직접 말로 표현하는 대신, 하트나 나무, 구름, 달 같은 상징을 써요. 고래, 멧돼지, 사슴, 호랑이 등 암각화 속 동물들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죠"

울산지방검찰청 신축 당시, 암각화 대작을 의뢰받은 경험은 전환점이 됐다.

김 교수는 울산지검이 새 건물로 이전하면서, 암각화 관련 대형 작품을 요청받았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작업을 통해 암각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기존의 제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이후 대도시 호텔에도 걸리게 됐고요. 특히 호텔 로비에 걸린 그림은 베이지 톤으로 편안하게 표현한 게 사람들 마음에 닿은 것 같아요."

김 교수는 암각화를 중심 주제로 삼진 않지만, 기존 작품 속 이야기들과 어우러져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엔 전혀 맞지 않는 줄 알았던 암각화가 오히려 작업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어요. 제 작업에 다양한 생명력을 더해주고 있죠."

그는 더 많은 작가가 암각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길 기대하고 있다.

"암각화가 너무 거창하고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증할 필요까지 없고 작가마다 자유롭게 풀어내다 보면, 울산의 자랑인 반구대 암각화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요?"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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