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조암골
백운마을에서 백운골 방향으로 약 1㎞쯤 들어가면 경주 남 남산 열암곡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 주차장 뒤편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땅속에 엎드려 있는 부처님으로 유명한 열암곡(일명 새갓골)으로 향하는 길이다. 양조암골은 이곳에서 백운계곡을 왼쪽에 두고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가면 된다.
길 초입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50m 정도 들어가면 오른쪽 첫 번째 계곡인 열암곡이 나타나고, 양조암골은 이곳에서 다시 0.5㎞ 정도 더 올라가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길 초입이 되는 셈이다.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약 0.5㎞ 정도 경사진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 능선을 따라 커다란 바위들이 마치 줄지어 서 있는 듯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들을 ‘줄바위’ 또는 ‘열암(列岩)’이라 부른다. 양조암골 제1사지는 바로 이 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절터 옆으로는 작은 폭포가 흐르고, 뒤편에는 높이 10여m에 이르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절터의 돌축대는 많이 허물어졌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축대는 남쪽을 향해 조성됐으며, 앞뒤로 이중 축대를 쌓았던 흔적도 확인된다. 현재 남아 있는 축대의 길이는 약 10m, 폭은 8m 정도로 보인다.
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무덤이 들어서 있으며, 뒤편에는 흩어져 있던 불상 조각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흔적이 보인다. 분실이나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이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처님을 모셨던 대좌는 방형의 복련대석으로 사방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조각했고, 각 면에는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불두(佛頭)와 다리 일부가 떨어져 나가 원형을 알기 어렵다. 남아 있는 형태로 보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결가부좌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가슴 윗부분과 오른팔, 오른쪽 무릎 부분이 결실돼 있으며, 남아 있는 부분도 풍화와 훼손이 심해 세부 모습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제1사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능선 아래에서는 필자는 아직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마애불 흔적으로 보이는 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바위면은 비교적 평평한 화강암으로 높이 약 6~7m, 폭 3~4m 정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결가부좌한 불상의 윤곽처럼 보이는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 바위는 처음부터 선각(線刻)에 가까운 형태의 마애불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바람과 풍화작용을 견디면서 표면이 심하게 마모돼 현재는 형체를 분명히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만약 이 바위가 실제 마애불 조성 흔적이라면 양조암골 사찰 유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만큼, 문화재 관련 기관의 정밀한 조사와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 양조암골 제2사지
1사지에서 왼쪽에 계곡을 두고 약 150여m 오른쪽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큰 돌로 축대를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주변에는 풀과 덩굴이 뒤엉켜 있어 접근조차 쉽지 않지만, 많은 기와 파편들이 널려 있고 막새기와도 발견돼 이곳 역시 폐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땅속에서도 기와 조각이 발견될 정도로 기와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양조암골 제3사지
제2사지에서 개울을 따라 50여m쯤 오르다가 개울을 건너면 서쪽 방면 산중턱에 거대한 건축터가 나타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이가 150m, 폭이 10m 이상 돼 보이는 대규모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중간에는 커다란 무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축대 주변에는 큰 나무들과 가시덩굴이 뒤엉켜 있어 짐승들조차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있다.
2004년 경주시 정밀학술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은 "통일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절터로 추정되며, 다량의 석탑재와 석축이 남아 있고 대규모 사찰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탑재 대부분은 흙 속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드러난 부분만 보더라도 첫 옥개석의 추녀 길이가 2.1m에 이르러 동남산 양피사(讓避寺) 서탑에 버금가는 상당한 규모의 탑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저술한 불교 비판서이다. 정도전은 유교(성리학)의 관점에서 불교의 윤회설, 인과응보설, 지옥설 등의 교리를 민심을 현혹하는 사설(邪說)이라고 비판하면서 "개불위사이안(開佛爲死而安)"이라는 말을 남겼다. 즉 "부처를 물리치면 죽어서도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처럼 경주 남산의 수많은 불상과 탑, 마애불 가운데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남·남산 자락의 절터와 불상이 있었던 곳에는 지금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불상과 탑을 산산조각 냈던 것일까? 파불(破佛)이 이뤄진 시기와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돌들이 무덤의 축대나 석재로 사용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양조암골 계곡을 따라 조성됐던 세 곳의 사찰은 남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융성했던 사찰군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전하는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일대에 양조암(陽朝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기 때문에 골짜기 이름도 양조암골이라 불리게 됐고, 폐사지 역시 양조암 제1사지·제2사지·제3사지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나오는 "부처를 물리치면 죽어서도 편안하다"라는 구절 때문이었을까. 산산조각 나 흩어져 있는 불상 조각들을 마주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