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집 혼주인 학성 이씨 이시윤이 종손 이중오의 혼례를 위해 신붓집 혼주에게 보낸 혼서(1783년).  신랑 이중오는 죽오 이근오(1760~1834)의 어릴 적 이름으로, 그는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했고, 병조좌랑을 지냈다.  울산박물관 제공
신랑집 혼주인 학성 이씨 이시윤이 종손 이중오의 혼례를 위해 신붓집 혼주에게 보낸 혼서(1783년). 신랑 이중오는 죽오 이근오(1760~1834)의 어릴 적 이름으로, 그는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태어나 문과에 급제했고, 병조좌랑을 지냈다. 울산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울산의 대표 가문인 학성 이씨가 지역 양반사회에서 위상을 높이는 과정에는 과거 급제나 향촌 활동뿐 아니라 유력 가문과의 혼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종서 울산대학교 교수는 울산박물관 특별전 ‘울산 결혼백서’ 도록에 실린 논고 ‘조선후기 울산지역 학성 이씨 사족 가문의 혼인 양상’에서 다양한 족보와 지역 사료를 토대로 학성 이씨 가문의 성장 과정과 혼인 관계를 분석했다. 조선시대의 혼인이 개인 간 결합을 넘어 가문의 위상과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좌우하는 핵심 수단이었다는 설명이다.

논고에 따르면, 조선시대 양반은 단순히 관직을 지낸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리학적 소양과 과거 급제자 배출, 학맥과 혼맥 등을 갖춘 가문이 양반·사족으로 인정받았으며, 혼인은 이러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했다.

울산에서는 학성 이씨가 이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고려 말 토성(土姓) 세력이었던 학성이씨는 조선 초기 중앙 관료를 꾸준히 배출하지 못했지만, 17세기 이후 성리학과 과거를 중시하는 사회 변화에 대응하며 지역 양반가로 성장했다. 좌수와 별감 등 향촌의 주요 직책을 맡아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혼맥은 가문의 위상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반이 됐다.

1600년대 전·중반 학성 이씨는 울산박씨와 가장 활발하게 혼인하며 지역 내 양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당시 울산 박씨는 무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울산의 대표적인 양반가였으며, 두 가문의 통혼은 지역사회에서 위상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토대가 됐다.

17세기 중반에는 영천에서 울산으로 이주한 밀양 박씨 송정파와의 혼인이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밀양박씨 박창우 가문은 대과와 소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였다. 학성 이씨는 이들과 혼인하고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성리학적 역량을 높였고, 지역 안팎에서 인정받는 사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혼인 관계가 구강서원 건립으로도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1659년 건립이 발의돼 1679년 완공된 구강서원은 학성 이씨와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서원 건립을 계기로 학성 이씨 중심의 혼인·학문 네트워크가 강화되면서 울산지역 양반사회의 질서도 새롭게 재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역 양반사회의 중심축도 점차 학성 이씨를 중심으로 재편된 것으로 분석됐다.

1700년대 이후에는 울산지역 내 혼인이 감소하고 다른 지역 유력 가문과의 혼인이 늘어났다. 학성 이씨가 지역 안에서 쌓은 위상과 성리학적 역량을 바탕으로 교류 범위를 넓히면서 울산을 대표하는 양반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논고는 학성 이씨의 혼인 관계가 조선 후기 울산 양반사회의 재편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한다. 혼인은 단순한 두 가문의 결합을 넘어 학문적 교류와 향촌 질서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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