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은 수백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축적된 자원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녔지만, 그렇다고 무한한 관광 콘텐츠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17개 자치주에 걸쳐 총 50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스페인. 세계유산 보유국 기준 세계 5위에 오를 만큼 풍부한 문화·역사 자원을 자랑지만 세계유산을 품은 도시마다 모두 북적이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각자도생 대신 공동 브랜드를 구축해 개별 도시의 관광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하나의 ‘원팀’으로 뭉쳐 제한적인 유산 활용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 경제의 질적 성장으로 연결하고 있는 단단한 연대 전략을 현지에서 짚어봤다.

 

세계유산을 보유한 스페인의 15개 도시로 구성된 ‘스페인 세계유산도시 그룹(Ciudades Patrimonio de la Humanidad, 이하 GCPHE)’ 활동 사진. 조직 운영의 핵심인 총회는 15개 도시의 시장으로 구성됐다. GCPHE 그룹 제공
세계유산을 보유한 스페인의 15개 도시로 구성된 ‘스페인 세계유산도시 그룹(Ciudades Patrimonio de la Humanidad, 이하 GCPHE)’ 활동 사진. 조직 운영의 핵심인 총회는 15개 도시의 시장으로 구성됐다. GCPHE 그룹 제공
세계유산을 보유한 스페인의 15개 도시로 구성된 ‘스페인 세계유산도시 그룹(Ciudades Patrimonio de la Humanidad, 이하 GCPHE)’ 활동 사진. 조직 운영의 핵심인 총회는 15개 도시의 시장으로 구성됐다. GCPHE 그룹 제공
세계유산을 보유한 스페인의 15개 도시로 구성된 ‘스페인 세계유산도시 그룹(Ciudades Patrimonio de la Humanidad, 이하 GCPHE)’ 활동 사진. 조직 운영의 핵심인 총회는 15개 도시의 시장으로 구성됐다. GCPHE 그룹 제공

# 경쟁 대신 상생과 협력...함께 성장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인구 5만8,000명의 소도시 아빌라. 구시가지 중심에는 16세기 귀족 가문이 세운 르네상스 양식의 저택이자 궁전인 팔라시오 데 로스 베르두고(Palacio de los Verdugo)가 있다.

아빌라시의 문화·유산 관리 부서가 들어서 있는 동시에 ‘스페인 세계유산도시 그룹(Ciudades Patrimonio de la Humanidad, 이하 GCPHE)’의 본부다. GCPHE 그룹의 모태이자 중심지로서 주요 회의와 세미나가 기획되는 등 유산 보존 정책의 지혜가 모이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유산 지정은 커다란 영예지만 한편으로는 엄격한 관리 책임과 현실적인 부담을 안기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이 공통의 숙제를 함께 풀기 위해 1993년 9월 6개 도시 연대로 GCPHE 그룹이 첫발을 내딛었다.

스페인 내무부 공익단체로 지정된 비영리 그룹으로 현재는 엄격한 절차를 거친 15개 회원 도시(아빌라, 알칼라 데 에나레스, 바에사, 카세레스, 코르도바, 쿠엥카, 이비사, 메리다, 살라망카,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세고비아, 타라고나, 톨레도, 우베다)로 확대돼 보존·관광·문화·도시 관리 전반에 걸쳐 공동 대응하고 있다.

협회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회원 도시들의 자발적 참여로 마련된다. 매년 각 도시가 9만 유로(약 1억3,000만원)의 회비를 납부하고, 이는 공동 마케팅과 유산 보존, 문화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핵심 활동비로 쓰인다.

조직 운영의 핵심인 총회는 15개 도시의 시장으로 구성됐으며 의장직은 도시명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1년마다 돌아가며 맡는다. 특정 도시의 독주나 권력 쏠림을 방지하고 선출 과정의 정치적 잡음이 발생하지 않기 위한 장치다.

유산을 지키기 위한 영역은 학교로도 넓혔다. GCPHE 그룹은 지난해 15개 대학과 손잡고 세계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교육·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지속가능한 관광 모델은 무엇인지까지, 세계유산도시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숙제를 대학의 연구 역량과 함께 풀겠다는 것이다.

 

GCPHE 그룹 의장을 맡고 있는 루벤 비녜알레스(Rubén Viñuales) 스페인 타라고나시 시장이 화장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GCPHE 그룹 의장을 맡고 있는 루벤 비녜알레스(Rubén Viñuales) 스페인 타라고나시 시장이 화장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스페인 타라고나시 시장이자  GCPHE 그룹 의장인 루벤 비녜알레스(Rubén Viñuales). GCPHE 그룹 제공
스페인 타라고나시 시장이자 GCPHE 그룹 의장인 루벤 비녜알레스(Rubén Viñuales). GCPHE 그룹 제공

# 노하우 공유 넘어 실질적 재정 확보로

현재 의장을 맡고 있는 루벤 비녜알레스(Rubén Viñuales) 스페인 타라고나시 시장은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은 그룹의 결속력에 깊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타라고나에서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비녜알레스 의장은 “15개 도시 시장의 소속 정당은 제각각이지만, 유산 보존과 홍보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모두가 ‘친구’라 생각할 만큼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총회에 안건이 올라오면 익명으로 투표를 하고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처리해 충돌이 거의 없다. 이견이 생기더라도 다음 회의로 미뤄가며 충분한 합의를 끌어낸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결속력은 회원 도시 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페인 정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낼 때 한층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회원 도시들은 인구 1만 5,000명대의 소도시부터 30만명대 도시에 이르기까지 규모와 여건이 제각각이지만, 세계유산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한 배를 타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비녜알레스 의장은 “15개 도시가 서로를 돕고 축적된 노하우를 기꺼이 공유한다. 협회가 하나의 단단한 팀으로 세계를 상대로 홍보를 펼치고 있다. 협상력 차원에서도 연대의 힘은 절대적이다. 스페인 국왕을 영접할 때 시장 개인으로 나서는 것과 15개 도시 협의회 차원에서 나서는 것은 위상부터 다르다”라며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세계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한 도시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 때문에 그동안 정부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연대의 가치와 노력을 입증해 왔다. 정부 역시 이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올해 지원을 결정했고, 결국 회원 도시마다 300만 유로(약 45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300만 유로는 도시 규모에 따라 체감도가 다르겠지만 소도시일수록 더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끌어낼 수 있도록 그룹 차원의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스페인 아빌라의 라 노체 델 파트리모니오(La Noche del Patrimonio, 유산의 밤) 행사 사진.
스페인 아빌라의 라 노체 델 파트리모니오(La Noche del Patrimonio, 유산의 밤) 행사 사진.

 

#‘머무는 관광’ 숙제…‘로컬푸드’ 승부수

그룹이 주도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는 라 노체 델 파트리모니오(La Noche del Patrimonio, 유산의 밤)다. 매년 9월이면 15개 도시가 같은 날 밤, 도시 곳곳의 문을 활짝 열고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한다.

표를 산 뒤 정해진 시간 안에 지정된 동선을 따라 둘러보는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관람에서 벗어난 최대 규모의 동시 다발적 밤샘 문화 축제다. ‘역사 유산의 보존’과 ‘현대 예술’을 결합해 당일치기 관광객을 체류형 관광객으로 전환하는 핵심 마케팅 카드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의 공식 후원을 받으며, 협회의 위상과 국제적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GCPHE 그룹은 세계유산을 단순히 보존하고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결합해 관광객의 경험과 체류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 도시 간 연계를 위해 꺼내든 카드가 ‘로컬푸드’다. 관광 콘텐츠와 지역 정체성을 연결하는 핵심 요소로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15개 도시를 여행하며 각 지역의 로컬푸드를 체험하고 스탬프를 모으면 고급 호텔 숙박권을 제공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먹거리를 도시 간 이동과 체류의 강력한 유인책으로 삼는 것이다.

 

 

GCPHE 그룹 회원 도시인 아빌라시 시장인 헤수스 마누엘 산체스 카브레라(Jesús Manuel Sánchez Cabrera)와 구메르신도 부에노(Gumersindo Bueno Benito) GCPHE 사무총장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GCPHE 그룹 회원 도시인 아빌라시 시장인 헤수스 마누엘 산체스 카브레라(Jesús Manuel Sánchez Cabrera)와 구메르신도 부에노(Gumersindo Bueno Benito) GCPHE 사무총장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구메르신도 부에노(Gumersindo Bueno Benito) GCPHE 사무총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구메르신도 부에노(Gumersindo Bueno Benito) GCPHE 사무총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구메르신도 부에노(Gumersindo Bueno Benito) GCPHE 사무총장은 “모든 회원 도시의 공통 과제는 관광객의 발길을 도시에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험이 필요한데 방문객들이 가장 크게 몰입하고 호응하는 분야가 바로 먹고 마시는 ‘미식’ 경험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중요한 것은 방문객 수보다 얼마나 가치있는 소비를 끌어내느냐에 있다. 지역 고유의 음식은 관광객이 가장 자연스럽게 소비하고 도시에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미식을 적극 결합해 체류형 관광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GCPHE 그룹은 세계유산을 보여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도시에서 먹고 마시며 머무는 경험까지 관광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지역의 고유의 맛에서 찾고 있다.

글=신섬미 기자 01195419023@iusm.co.kr

사진=신원윤 PD digital@iusm.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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