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는 높이 약 12m에 테니스 코트 10개 크기에 해당하는 대형 온실이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는 높이 약 12m에 테니스 코트 10개 크기에 해당하는 대형 온실이다. 이수화 기자

큐가든이 지하철역에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도시 속 식물원’이었다면 영국왕립원예협회(Royal Horticultural Society·RHS)의 대표 정원인 위즐리(RHS Garden Wisley)는 찾아가는 과정부터 달랐다.

런던 남서쪽 리치먼드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량 이동하자 정원 입구가 나타났다. 약 97㏊(240에이커) 규모의 위즐리는 도심 공원이라기보다 영국 원예산업의 생산·연구·교육 기반에 가까웠다.

RHS는 1903년 위즐리를 기증받은 뒤 이듬해 치즈윅 정원의 식물 시험 기능을 이곳으로 옮겼다.

위즐리 가든 입구에 있는 ‘가든 센터(Garden Centre)’로 다양한 식물 및 정원용품 등을 판매한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 입구에 있는 ‘가든 센터(Garden Centre)’로 다양한 식물 및 정원용품 등을 판매한다. 이수화 기자

#입구에서 시작되는 관람과 소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꽃밭이 아니라 대형 가든센터, 이른바 플랜트센터였다. 식물과 화분, 배양토, 관수용품, 정원도구와 원예서적이 넓은 공간을 채웠다.

전문 육종가와 영국 내 생산자들이 공급한 다양한 식물을 한자리에서 판매한다. 정원 안에서 식물 이름과 재배법, RHS가 우수성을 인정한 AGM(Award of Garden Merit) 식물을 확인한 뒤 돌아가는 길에 비슷한 식물과 자재를 고를 수 있다. 관람과 학습, 소비가 한 동선 안에서 이어졌다.

다만 취재팀이 방문한 날은 유럽에 폭염이 이어지던 날이어서 플랜트센터를 지나자 방문객은 띄엄띄엄 보였다.
 

위즐리 가든 내에 위치한 중국식 정자의 모습.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 내에 위치한 중국식 정자의 모습. 이수화 기자

#중국식 정자 지나 글래스하우스로

넓은 잔디 공간인 세븐 에이커스(Seven Acres)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호숫가에 붉은색 중국식 정자 ‘버터플라이 러버스 파빌리온(Butterfly Lovers’ Pavilion)’이 보였다. 2005년 RHS 햄프턴코트 팰리스 가든 페스티벌에 출품됐던 정자를 옮겨 상설 경관으로 활용 중이다.

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 내부는 컴퓨터 제어 기후 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여 열대·습윤 온대·건조 온대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기후가 독립적으로 통제된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 내부는 컴퓨터 제어 기후 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여 열대·습윤 온대·건조 온대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기후가 독립적으로 통제된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 내부는 컴퓨터 제어 기후 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여 열대·습윤 온대·건조 온대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기후가 독립적으로 통제된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의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 내부는 컴퓨터 제어 기후 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여 열대·습윤 온대·건조 온대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기후가 독립적으로 통제된다. 이수화 기자

은빛 곡선 지붕의 더 글래스하우스(The Glasshouse)로 발걸음을 옮겼다. RHS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조성돼 2007년 6월 문을 연 온실이다. 높이 약 12m, 테니스 코트 10개 정도의 면적으로, 온대·건조·열대 등 세 기후 구역에 약 6,000점의 식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건조 지대의 선인장과 다육식물에서 습도 높은 열대 식생으로 환경이 바뀌고, 빛과 온도·환기는 컴퓨터로 제어된다. 계절별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이 이어지며 겨울철 야간 빛 축제인 ‘글로우(Glow)’ 때는 정원의 중심 경관이 된다. 온실을 식물 수장고에 머물게 하지 않고 관람과 교육, 행사가 겹치는 기반시설로 쓰는 공간이다.

위슬리 가든을 찾은 방문객들이 대규모 자연주의 정원인 ‘아우돌프 랜드스케이프(Oudolf Landscape)’를 둘러보고 있다. 이수화 기자
위슬리 가든을 찾은 방문객들이 대규모 자연주의 정원인 ‘아우돌프 랜드스케이프(Oudolf Landscape)’를 둘러보고 있다. 이수화 기자

#20년 된 정원 다시 설계한 피트 아우돌프

글래스하우스 앞 경사면에는 여러해살이풀과 그라스류가 덩어리를 이루고, 구불구불한 길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네덜란드 출신 정원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한 ‘아우돌프 랜드스케이프(Oudolf Landscape)’다. 그의 자연주의정원은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에도 조성돼 있다.

아우돌프는 2001년 이곳의 글래스하우스 보더를 처음 설계했다. RHS는 20여 년이 지나자 기존 식재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고 다시 설계를 맡겼다. 2024년 5월 새 정원이 문을 열기 전 정원사와 후원자들은 약 3만6,000포기의 식물을 새로 심었다.

곧게 뻗은 두 개의 긴 화단은 굽이치는 길과 섬 모양의 화단으로 바뀌었다. 한두 핵심 품종이 바탕을 만들고 여러 식물이 그 사이를 채우는 ‘매트릭스 식재’다. 자연스럽게 흩어진 듯 보이지만 식물의 높이와 개화 시기, 잎과 씨앗의 형태까지 계산한 구성이다.

관람객 옆에서는 정원사들이 시든 식물을 정리하고 빈자리에 새 식물을 심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든 정원도 20년 뒤 다시 평가하고 고쳐 심고 있었다.

라벤더가 나선형으로 심어진 뷰잉 마운트(Viewing Mount·전망 언덕)에 오르자 아우돌프의 정원이 완만한 비탈을 따라 펼쳐지고, 그 끝에 은빛 곡선의 더 글래스하우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영국왕립원예협회(RHS)가 위즐리 정원에 설립한 영국 최초의 전용 원예과학연구센터인 ‘RHS 힐탑(RHS Hilltop)’의 모습. 이수화 기자
영국왕립원예협회(RHS)가 위즐리 정원에 설립한 영국 최초의 전용 원예과학연구센터인 ‘RHS 힐탑(RHS Hilltop)’의 모습. 이수화 기자

#꽃밭 한가운데 들어선 원예과학 연구소

위쪽으로 조금 더 옮겨가자 2021년 6월 문을 연 RHS 힐탑(RHS Hilltop-The Home of Gardening Science)이 나타났다. 영국 최초의 원예과학 전용 연구센터다.

힐탑에는 연구실과 식물건강 시설, 표본관, 곤충 컬렉션, 도서관과 교육 공간이 모여 있다. 연구시설을 방문객과 분리하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공개 강연과 시연이 열리고 도서관은 일반 관람객도 이용할 수 있다. 주변의 웰빙가든(Wellbeing Garden), 와일드라이프 가든(Wildlife Garden), 월드푸드 가든(World Food Garden)은 건강·생물다양성·식용작물 연구를 정원으로 보여준다.

원예과학연구센터인 ‘RHS 힐탑(RHS Hilltop)’ 로비에서 방문자들은 현미경을 이용해 전시된 곤충 표본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수화 기자
원예과학연구센터인 ‘RHS 힐탑(RHS Hilltop)’ 로비에서 방문자들은 현미경을 이용해 전시된 곤충 표본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수화 기자

위즐리에서는 2년 과정의 ‘원예 실무 디플로마’를 운영한다. 교육생은 기간제 직원으로 고용돼 여러 정원팀을 순환하며 근무하고 이론과 실습을 함께 이수한다. 정원이 연구시설이자 교육장이자 일터를 동시에 겸하는 구조였다.

힐탑을 나와 배틀스턴 힐 쪽으로 이동하자 정상부의 거대한 말머리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조각가 닉 피디언-그린(Nic Fiddian-Green)의 ‘스틸 워터(Still Water)’로, 물을 마시듯 고개를 숙인 말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위즐리 가든 내 배틀스턴 힐(Battleston Hill) 꼭대기에 설치돼 있는 조각가 닉 피디안 그린의 ‘잔잔한 물(Still Water)’ 작품. 이수화 기자
위즐리 가든 내 배틀스턴 힐(Battleston Hill) 꼭대기에 설치돼 있는 조각가 닉 피디안 그린의 ‘잔잔한 물(Still Water)’ 작품. 이수화 기자

#가장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좋은 식물’을 가린다

트라이얼스 가든(Trials Garden)은 위즐리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장방형 시험구가 바둑판처럼 나뉘고 같은 종류의 서로 다른 품종이 나란히 심겨 있었다. 경관정원이라기보다 야외 실험실에 가까웠다.

육종가와 종묘업체 등이 제출한 관상·식용식물을 같은 조건에서 키우며 건강 상태와 생육, 기후·병해충 저항성 등을 비교한다. 시험은 최대 5년까지 진행된다. 식물군별 전문가가 심사하고 RHS 전문가 그룹의 확인을 거쳐 우수 식물을 선정한다.

그 결과가 1922년 시작된 AGM이다. RHS는 2026년 명칭을 ‘RHS Recommended: Award of Garden Merit’로 바꿔 소비자 추천 기능을 분명히 했다.

AGM은 소비자에게는 믿고 살 수 있는 식물의 기준이고 생산·유통업체에는 품질 신호다. 시험정원의 지식이 플랜트센터와 종묘시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영국왕립원예협회(RHS, Royal Horticultural Society)가 운영하는 위즐리 가든(RHS Garden Wisley)은 런던 남서쪽 서리주에 위치한 영국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된 대표 정원이다. 이수화 기자
영국왕립원예협회(RHS, Royal Horticultural Society)가 운영하는 위즐리 가든(RHS Garden Wisley)은 런던 남서쪽 서리주에 위치한 영국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된 대표 정원이다. 이수화 기자

#연구·교육을 굴리는 멤버십과 판매

RHS의 2025~2026 회계연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과 디지털 구독자는 62만4,000명 이상이고, 5개 RHS 정원의 연간 방문객은 300만 명을 넘는다. 회원·커뮤니케이션 부문 수입은 3,610만파운드로 전체의 27%, 소매·식음료·온라인 판매·광고·대관 등 사업 수입은 3,700만파운드로 28%였다.

회원비와 입장료, 플라워쇼, 판매, 후원과 기부 등으로 수입원을 다변화해 정원 관리와 연구·교육을 뒷받침한다.

연구는 판매 기준에도 반영된다. RHS의 5개 정원은 2025년 7월부터 이탄을 사용하지 않는다. 2026년 1월부터 가든센터와 온라인몰에서도 ‘노 뉴 피트(No New Peat)’ 식물만 판매한다.

 

국가 주도 축제는 멈췄지만, RHS는 상설 기반을 키웠다

영국은 독일 연방정원박람회(BUGA)를 본뜬 국가정원축제(National Garden Festivals)를 1984년 리버풀부터 1992년 에부베일까지 2년마다 다섯 차례 열었다. 쇠퇴한 공업도시의 오염·유휴부지를 정비하고 민간 개발을 유도하기 위한 정부 주도 도시재생 사업이었다.

그러나 정부 평가에서 축제만으로 장기적인 도시재생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드러났고 정책적 관심도 약해지면서 1992년을 끝으로 중단됐다.

RHS의 상설 정원과 플라워쇼는 국가정원축제 이전부터 운영되고 있었다. 다만 국가가 대규모 부지 재생형 축제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는 동안, RHS가 상설 정원과 연구·교육시설을 운영하고 여러 지역에서 단기 플라워쇼를 여는 구조가 영국 원예 분야의 주요 축으로 자리 잡았다.

첼시플라워쇼는 기존 장소에서 계속 열면서도 2025년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2026년 배드민턴과 샌드링엄, 2027년 브리스틀 등 새로운 개최지도 찾고 있다. 상설 연구·교육 기반은 유지하면서 쇼의 콘텐츠와 개최지는 유연하게 움직이는 방식이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