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재미있는 광고를 하나 보았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장이 아내에게 며칠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가족의 배웅을 받고 떠난 여행지는 화장실이었다. 남자는 변기에 앉으면서 비로소 '혼자'가 된다. 이 광고는 요즘 세태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과장이 담겨있다. 광고의 주인공은 아빠지만 사실 엄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가정을 꾸린 어른이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만한 공간이 화장실뿐이라는 설정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반전이 하나 있다. 변기에 앉은 남자가 꺼내든 건 '스마트폰'이다. 그가 떠난 여행지는 작은 화면 속이다. 그 안에는 그가 누리고 싶었던 여유도 없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는 더더욱 없다.
가정을 꾸렸든, 그렇지 않든, 현대인은 대부분 온전한 의미에서 혼자가 되는 경험을 잘 누리지 못한다. 어쩌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불쑥 끼어든 스마트폰으로 인해 싹둑싹둑 잘린다. 책을 보다가도, 운동을 하다가도, 공부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우린 수시로 작은 화면을 확인한다. 뭔가에 긴 시간 몰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서울대 황농문 교수는, 진정한 행복은 외부적 성취나 수동적인 휴식이 아니라 내면의 에너지를 온전히 한곳으로 집중할 때 경험하는 '몰입(Flow)'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 말대로라면, 몰입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엔 행복감을 느끼는 일도 힘들어진다는 도식이 생긴다.
황농문 교수는 저서 『몰입』을 통해 선비들의 공부법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몰입'의 과정이었음을 과학적으로 재조명한다. 과거 선비들에게 글공부는 입신양명을 위한 고단한 노동이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고 도(道)를 깨닫는 즐거운 과정이었다. 경전을 외우고(배송), 정성스레 써 내려가는(사경) 체화의 과정 속에서 선비들은 잡념을 잊고 지적 희열을 맛보았다. 밥 먹는 것도 잊고 몰두하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그 짜릿한 기쁨, 즉 '공부삼매(工夫三昧)'가 그들에겐 최고의 행복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저술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것 역시 몰입의 힘이었다.
이러한 몰입의 경험은 비단 학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예술적 활동은 우리를 강력한 몰입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통로다.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결과물의 완벽함을 떠나 그 과정 자체에 온전히 빠져들게 한다. 그 순간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일상의 잡념은 사라진다. 한껏 몰입한 후에 고개를 들면 내면이 충만해졌음을 느낀다.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은 평범한 버스 운전사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본 것들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쓴다.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성공도 없지만, 그는 시를 짓는 창조의 순간에 가장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에게 시 쓰기는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일상이자 행복의 원천이다. 그는 그냥 '버스 운전사'가 아니다.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다. 우리 모두에겐 '시를 쓰는' 같은 수식어가 필요하다. '그림 그리는 배관공', '소설 쓰는 청소부', '바이올린 켜는 영업사원'처럼. 그 수식어들은 행복할 가능성을 더 높여줄 것이다.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 없다. 오늘 저녁,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들고 집안의 가장 외진 곳에 앉아보는 건 어떨까? 일기를 써보거나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 먼지 쌓인 악기를 오랜만에 잡아보는 건? 서툴러도 괜찮다. 몰입으로 향하는 문을 찾게 되면, 조금은 더 살만한 인생이 될 것이다.
